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강국(李康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AC15AD6DB1906X0
생년1906(광무 10)
졸년1953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공산주의 운동가
출생지경기도 양주
저서『민주주의 조선의 건설』

[상세내용]

이강국(李康國)
1906년∼1953년.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주 출생.

1908년 서울로 가족이 이주하였으나 몰락하여 충청남도 예산 등지의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자랐다. 보성중학교에 특대장학생으로 입학,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고유섭(高裕燮)과 함께 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기로 입학하였다.

법문학부로 진급하여 박문규(朴文圭)최용달(崔容達) 등과 함께 좌익서적을 탐독하면서 교내좌익서클인 경제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졸업 뒤에도 대학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출판한 잡지 『신흥(新興)』 제3호에 저자‧발행인이 되고, 「일행정재판의 사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2년 처남의 경제적 원조로 독일에 유학, 베를린대학에 적을 두고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혁명적 아세아인회 등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귀국하여 증권회사 사무원으로 일하는 한편, 1936년 이주하(李舟河)최용달 등과 원산적색노조에 관계하다가 1938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1941년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이듬해인 1942년 다시 붙잡혔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나 공산주의운동에서 손을 떼고 소일하면서 최용달과 연락을 지속하는 한편, 광복 직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비밀결사체인 건국동맹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광복 뒤 본격적으로 공산주의활동을 재개하여 1945년 9월 4일 개편된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9월 6일 발족한 조선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년 2월 좌익단체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임시약헌기초위원 등을 맡았다.

같은해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여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사무국장, 1948년 상업성법규국장, 1950년 인민군 제16호 병원장, 1952년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 등을 역임하다가 1953년 남로당계 숙청 때 체포되어 간첩죄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집행되었다.

저서로는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年鑑(朝鮮通信社, 1947)
南勞黨硏究資料集 Ⅱ(金南植,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1)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