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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李舟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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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05(광무 9)
졸년1950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공산주의 운동가
출생지화전민마을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주하(李舟河)
1905년∼1950년.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 일명 주화(舟花). 함경남도 북청홍원 접경, 외딴 화전민마을에서 태어났다.

1908년경 아버지가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의심받아 가족이 원산으로 이사하여 부모가 날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13년경 원산사립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 3년 뒤에는 보광학교(保光學校)로 진학하였다. 보광학교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님의 유인물제작을 도운 것이 탄로나 형이 있던 갑산으로 피신하였고, 그뒤 3년여 동안 원산에서 객주집 심부름꾼, 일본인 상점 점원, 우편국 배달부 등을 전전하다가 일본으로 가 일본대학 정치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8년 원산파업사건 뒤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협동소비조합운동에 대한 비판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1931년 정재헌(鄭在憲) 등과 함께 평양노동연맹 좌익화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책임위원을 맡았다가 1932년 일본경찰에 잡혀 1936년까지 원산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한 뒤 최용달(崔容達)이강국(李康國) 등과 원산적색노조활동에 관계, 이강국최용달김재갑(金載甲) 등이 검거되자 진남포에 피신하여 지하에 숨어 있었다.

광복 뒤에는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남도지구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월남하여 박헌영(朴憲永)이강국 등의 재건조선공산당 정치국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46년 9월 좌익계열에 대한 검거 때 홍남표(洪南杓) 등과 함께 미군정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2월에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박헌영이 월북한 뒤 총책을 맡은 김삼룡(金三龍)을 보좌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뒤 북한에서 이북에 억류되어 있던 조만식(曺晩植)과의 교환제의를 하여 대한민국 당국과 성명을 교환하던 중 6‧25가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즉결처형되었다.

[참고문헌]

指導者群像(金午星, 大成出版社, 1946)
朝鮮年鑑―1948―(朝鮮通信社, 1947)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