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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빈(韓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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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01(광무 5)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공산주의 운동가
출신지함경북도 경원

[상세내용]

한빈(韓斌)
1901년∼미상. 공산주의운동가. 별명은 한하미르한페츠르. 함경북도 경원 출신.

4세 때 할아버지를 따라 노령(露領)으로 이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주하였다.

1920년 소련공산청년동맹에 가맹, 1923년 8월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다음해 5월에 졸업하였다. 만주지역 사회주의운동역량의 통일과 발전을 위하여 용정(龍井)의 동흥중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의를 조직하고, 1923년 박윤세(朴允世) 등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을 결성, 1924년 12월 조직부책임자가 되어 이 조직을 고려공산청년동맹 만주총국으로 확대, 재편시켰다.

1925년 9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파벌청산 및 당 통일의 임무를 띠고 최창익(崔昌益)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서울파 공청(共靑)의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3월 양명(梁明)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제3차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되는 레닌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 양명과 함께 모스크바에 있던 중,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해산방침을 전달받고 1929년 5월 하순 지린(吉林)에서 ML파 동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재조직 중앙간부를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연락임무를 담당하였다.

1930년 2월 초순경 한해(韓海)의 죽음과 고광수(高光洙)의 체포소식을 접하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3월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6년을 복역하였다.

1936년 출감한 뒤 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南京)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고, 이후 청년층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을 결성하였다.

1940년 최창익이 북상을 요구하자 이에 동의하고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타이항산(太行山)에 들어갔다.

1941년 8월 무정(武亭)이 설립한 조선의용대간부훈련반의 교사, 1942년 1월 화북조선청년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세계공산주의운동사의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7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화북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 및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평양으로 들어 갔다가 남한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직기반을 강화하고자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으로 서울에 와서 김명시(金明時)와 함께 순회강연 등에 주력하는 한편,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3월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자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그의 경력에 비하여 북한에서 고급 당간부나 위원이 되지 못하고 1956년 ‘연안파 숙청’시기에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現代史資料 29(姜德相편, みすず書房, 1972)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5(金俊燁‧金昌順, 청계연구소, 1986)

[집필자]

신주백(辛珠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