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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정(金武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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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05(광무 9)
졸년1951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생지함경북도 경성

[상세내용]

김무정(金武亭)
1905년∼1951년. 독립운동가‧공산주의운동가. 함경북도 경성 출생.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서울에 와서 생활하였으며 14세 때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일시 다녔으나 1923년 중퇴하고, 같은해 3월 중국으로 건너가 1924년 중국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강무당) 포병과에 입교하여 같은해 졸업, 임관하였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상해(上海)에서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였다. 국공분열 후에는 루이진(瑞金)의 중국노농홍군에 입대, 1934년 10월부터 전개된 2만5000리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37년 8월 노농홍군이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될 때 총부 작전과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1월 제8로군 최초로 창건된 포병단(병력 1,000여명)의 단장이 되었다. 제8로군이 화북 일본군에 대공세를 가하였던 1940년 봄 백단대전(百團大戰)에 포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뒤부터는 주로 조선인 민족간부 양성에 주력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1년 1월 太行山 속에서 결성) 조직을 주도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42년 7월에 조직된 조선의용군 총사령이 되었고, 그해말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를 창설하여 조선청년들을 교육하였다.

광복 후 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북한으로 입국,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같은해 7월 북조선노동당 제2비서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사령관 崔庸健)의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3월 조선노동당 제2차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6‧25 초기에는 제2군단장으로 출전, 인민군 후퇴시에는 수도(평양)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0년 12월 4일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명령불복종죄로 규탄받고 강등되어, 인민군 수인(囚人) 부대 연대장이 되어 평양 모란봉극장을 지하에 건설하기 위한 작업에 종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요구에 의하여 중국으로 인도되었으나 1951년 7월경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北韓全書(極東問題硏究所, 1974)
韓國共産主義運動史 5(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6)
武亭一代記(新天地, 1946. 3.)
民族運動史上の人物-武亭-(朝鮮民族運動史硏究會, 朝鮮民族運 動史硏究 2, 1985)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장군(결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편집위원회, 민족출판사, 北京, 1991)

[집필자]

염인호(廉仁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