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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文一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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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호암(湖巖)
생년1888(고종 25)
졸년1936
시대항일기
본관남평(南平)
활동분야학자 > 사학자
문천두(文天斗)
출신지평안북도 의주

[상세내용]

문일평(文一平)
1888년(고종 25)∼1936년. 사학자‧언론인.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호암(湖巖). 평안북도 의주 출신. 문천두(文天斗)의 아들이다.

1905년 유학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大成), 의주의 양실(養實),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광문회(光文會)에 관여하였다.

1911년 정치학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이때 안재홍(安在鴻)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우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상해(上海)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 근무하면서 논설을 쓰기도 하였고, 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정인보(鄭寅普)와 동거, 교학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와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이 시기에 민중‧언론‧혁명아‧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뒤 중동(中東)‧중앙(中央)‧배재(培材)‧송도(松都) 등의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조선일보』『중외일보(中外日報)』『개벽』 등에 글을 쓰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나갔다.

1925년 역사연구를 위하여 일본유학을 떠났으나 1년도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1933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찾아 이를 널리 보급하려 하였던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학연구가 그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연구를 통하여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으며, 역사적 지식의 정리와 의미의 보급에 더 힘을 쏟았다.

그의 논술이 지니는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그의 역사연구가 지니는 궁극적 목적이 역사 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를 않았다. 우리나라의 자연‧사적‧예술‧풍속 등 남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하여 이를 민족의 미래 개척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논술의 제목 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양조(漢陽朝)의 정치가군상」‧「사상(史上)의 기인」‧「사(史)와 시(詩)의 도(都)강화」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목을 취하였다.

셋째, 거의가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미관계 50년사」 등 몇 편은 예외이기는 하나 대부분 그의 글은 단문이다.

넷째, 평이한 문체로의 서술이다. 그의 사풍(史風)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을 완전 소화하여 이를 쉽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 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시켰다. 이는 민족사를 우선 반성적으로 고찰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외교사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역사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사에 나타난 파쟁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성리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에 결부시킴으로써 식민사학자들의 당파성 문제와는 궤를 달리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한국사의 장점 발견을 위한 노력과는 달리 민족사의 성찰과 반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다른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식‧민족정신 고취를 위하여, 역사연구의 최종 결집으로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다. ‘조선심(朝鮮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을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심’의 결정(結晶)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또,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자아(自我)의 재검토‧재수립으로 보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곧,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최선의 외교자세를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사학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구사(舊史)비판을 통한 독특한 사론(史論)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史實)을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誇大)와 부회(附會), 독단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湖巖全集
文一平의 人物評에 대하여(金光男, 史學硏究 36, 1983)
湖巖文一平의 外交認識(金光男, 史學硏究 38, 1984)

[집필자]

김광남(金光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