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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金祉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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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추강(秋岡)
생년1885(고종 22)
졸년1928
시대항일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경상북도 안동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김지섭(金祉燮)
1885년(고종 22)∼1928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추강(秋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하여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그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해시베리아 등 각지를 순력하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많은 동지들과 참가하였고, 그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국내에서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년 3월에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톈진(天津)으로 수송하여 이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하여 안동현(安東縣)에 중개소까지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폭탄을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黃鈺) 등으로 하여금 서울로 가져오게 하여 3월 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같은해 12월에 다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시 판사였던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청했으나, 배신당하고 동지 윤병구(尹炳球)마저 붙잡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무렵 일본에는 관동대진재가 일어나 한국인의 학살이 심하다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1924년초 일본 동경에서 소위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보복의 기회로 결심하고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4일 동경으로 가던 중 대판(大阪)에서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황성(皇城)에 투탄하기로 결정하고 1월 5일 황성 정문에 접근하였는데, 호위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호위경관들이 달려오므로 나머지 폭탄은 니주바시(二重橋) 한복판에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若山과 義烈團(朴泰遠, 白楊堂, 1947)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Ⅱ(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집필자]

정원옥(丁原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