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존호(文存浩)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38C874D638B1884X0 |
이명(異名) | 문정호(文正浩) |
자(字) | 양오(養吾) |
호(號) | 오강(吾岡) |
생년 | 1884(고종 21) |
졸년 | 1957 |
시대 | 항일기 |
본관 | 남평(南平)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문재욱(文在郁) |
생부 | 문용(文鏞) |
조부 | 문재화(文在和) |
증조부 | 문주영(文周永) |
처부 | 권준희(權準熙) |
외조부 | 이규석(李奎錫)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옛 三嘉縣) |
묘소 | 용산(龍山) 부정원(負丁原) |
저서 | 『오강문집(吾岡文集)』 |

[상세내용]
문존호(文存浩)
1884년(고종 21) 윤5월 29일∼1957년 7월 7일. 일제강점기 유학자이다. 자는 양오(養吾), 호는 오강(吾岡), 본관은 남평(南平), 출신지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옛 三嘉縣)이다. 초명(初名)은 문정호(文正浩) 후에 문존호(文存浩)로 개명(改名)하였다. 증조부는 문주영(文周永), 조부는 오담(梧潭) 문재화(文在和), 부친은 겸산(謙山) 문용(文鏞)이며 백공(伯公) 문재욱(文在郁)에게 입사(入嗣)하였다. 외조부는 인천이씨(仁川李氏) 이규석(李奎錫), 처부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준희(權準熙)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백(文柏)이다.
7세에 효경(孝經)을 깨달아 터득하고 질문을 조리 있게 잘하여, 인근 사람들로부터 재동으로 불리었다.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배우다가, 후산(后山) 허유(許愈)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1919년 3월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은 경북 상주(尙州)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는데, 이때 그도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향년 74세로 사망하였다. 묘지는 용산(龍山) 부정원(負丁原)이다.
시문집으로 『오강문집(吾岡文集)』이 있다.
7세에 효경(孝經)을 깨달아 터득하고 질문을 조리 있게 잘하여, 인근 사람들로부터 재동으로 불리었다.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배우다가, 후산(后山) 허유(許愈)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1919년 3월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은 경북 상주(尙州)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는데, 이때 그도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향년 74세로 사망하였다. 묘지는 용산(龍山) 부정원(負丁原)이다.
시문집으로 『오강문집(吾岡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吾岡文集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발행자 竹村一, 편저자 朴慶植, 1975)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발행자 竹村一, 편저자 朴慶植, 1975)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집필자]
전주원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