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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禹在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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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우경옥(禹景玉)
이명(異名)김재수(金在洙)
이명(異名)김재서(金在瑞)
이명(異名)김한조(金漢朝)
이명(異名)김상호(金尙浩)
자(字)이현(利見)
호(號)백산(白山)
생년1884(고종 21)
졸년1955
시대항일기
본관단양(丹陽)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우재룡(禹在龍)
1884년(고종 21)∼1955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일명 경옥(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자는 이현(利見), 호는 백산(白山).

1903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참교(參校)로 근무하였다.

1906년 의병이 되기 위하여 탈영, 영천정용기(鄭龍基)와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켜 그의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 많은 혈전을 폈다.

정용기가 죽은 뒤에는 그를 계승한 그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진영의 선봉장으로서 영일경주청송영천대구 근방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 무기조달관계로 대구에 잠입하였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1911년에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출옥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니,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발전하여 1910년대 독립운동의 가장 큰 규모의 국내조직이 되었다.

이때 국내와 국외의 연락책임을 맡아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서 독립군연락기지건설과 군자금모금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만주에서는 안동에 상주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재만독립군기지인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 또는 신흥학교와의 연락, 그리고 국내로 보내는 무기조달과 격문발송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1917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광복회의 격문은 거의 그의 주선에 의하여 배포된 것이며, 또 1917년 11월에 처단된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1월에 처단된 아산의 도고면장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에 대한 암살투쟁과 무기공급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1918년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거의 파괴당하였으나, 그는 남아 있는 한훈(韓焄)권영만(權寧萬)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회복에 주력하였다.

1920년 군산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뒤 감형되어 1937년 풀려나왔다. 출옥 후에도 옥중병고가 계속되어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뒤 권영만이관구(李觀求, 일명 海量)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여 독립운동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嶺南出身獨立運動略傳(윤보현, 光復先烈追慕會, 1961)
山南義陣遺史(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韓國言論社, 1972)
大韓光復會硏究(趙東杰, 韓國史硏究 42, 1983)

[집필자]

조동걸(趙東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