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金爀)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2AE40D601FFFFB1875X0 |
| 이명(異名) | 김학소(金學韶) |
| 호(號) | 오석(烏石) |
| 생년 | 1875(고종 12) |
| 졸년 | 1936 |
| 시대 | 조선후기 |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 출신지 | 경기도 용인 |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상세내용]
김혁(金爀)
1875년(고종 12)∼1936년. 독립운동가. 본명은 김학소(金學韶). 호는 오석(吾石또는 烏石). 경기도 용인 출신. 용인학원(龍仁學院)을 거쳐 1892년 3월에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897년 4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보병참위로 임관되었으며, 그뒤 육군참령(陸軍參領)에 승진되었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해산을 당하게 되자 일제와 항쟁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하고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남만주 봉천성 무송현(奉天省撫松縣)에 망명하였다.
같은해 8월에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명의 애국청년동지들을 규합하여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한 뒤 단장에는 김호를 추대하고 그는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9월경에는 봉천성 안도현 삼인방(安圖縣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 등 수백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산리전투를 겪은 다음 1921년 1월에 영안현 밀산(寧安縣密山)에서 서일(徐一)‧홍범도‧지청천‧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은 뒤인 1925년 3월 15일에 영안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신민부는 목릉현 추풍(穆稜縣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그는 교장을 겸임하여 500여명의 사관생을 양성, 독립운동의 기간요원화하였다.
그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총회 개최중 일본과 만주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아 항전하다가 박경순(朴敬淳)‧유정근(兪政根)‧이춘섭(李春燮) 등 10여명과 함께 붙잡혀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고,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하여 고향 용인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97년 4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보병참위로 임관되었으며, 그뒤 육군참령(陸軍參領)에 승진되었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해산을 당하게 되자 일제와 항쟁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하고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남만주 봉천성 무송현(奉天省撫松縣)에 망명하였다.
같은해 8월에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명의 애국청년동지들을 규합하여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한 뒤 단장에는 김호를 추대하고 그는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9월경에는 봉천성 안도현 삼인방(安圖縣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 등 수백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산리전투를 겪은 다음 1921년 1월에 영안현 밀산(寧安縣密山)에서 서일(徐一)‧홍범도‧지청천‧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은 뒤인 1925년 3월 15일에 영안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신민부는 목릉현 추풍(穆稜縣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그는 교장을 겸임하여 500여명의 사관생을 양성, 독립운동의 기간요원화하였다.
그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총회 개최중 일본과 만주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아 항전하다가 박경순(朴敬淳)‧유정근(兪政根)‧이춘섭(李春燮) 등 10여명과 함께 붙잡혀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고,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하여 고향 용인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現代史硏究(李炫熙, 同和文化社, 1972)
독립군의 전투(민족문화협회, 198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독립군의 전투(민족문화협회, 198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이미지]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