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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긍섭(曺兢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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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근(仲謹)
호(號)심재(深齋)
생년1873(고종 10)
졸년1933
시대조선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학자 > 유생
조병의(曺柄義)
저서『곤언(困言)』
저서『암서집(巖西集)』
저서『심재집(深齋集)』
저서『조명록(措明錄)』

[상세내용]

조긍섭(曺兢燮)
1873년(고종 10)∼1933년. 한말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 조병의(曺柄義)의 아들이다.

11살 때 『근사록(近思錄)』을 10일 만에 베껴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였고, 17살 때에는 당시 영남의 거유였던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태극‧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19살 때에는 대구에서 열린 향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기(李鍾杞)를 방문하였고, 20살을 전후로 장복추(張福樞)김흥락(金興洛) 등을 찾아가 문답하였다.

23살 때에는 『남명집(南冥集)』을 중간하는 사업(주로 교정)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들과 교유하였다.

26살 때 사서(四書)에 대해 의문나는 점을 묻기 위하여 다시 김흥락을 만났다.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부터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였다.

다음 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아 「거빈해(居貧解)」‧「성존심비변(性尊心卑辨)」 등의 논문을 써냈다. 상복을 벗자 자정(自靖)하면서 선비의 길을 걷고자 정산(鼎山)으로 숨어버렸다.

그뒤 문박(文樸)의 서재를 오가며 학문에 몰두하면서 정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일본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을 초(草)하다가 발각되어 17일간 구속당하기도 하였다.

1928년 겨울 문인들의 요청으로 정산에서 비슬산 서쪽 쌍계(雙溪)로 이거하여 구계서당(龜溪書堂)을 짓고 강학을 계속하다가, 1933년 61세로 죽었다.

일정한 스승은 없었으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고,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 특히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건창(李建昌)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하였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성격에만 집착하지 않은 학자였다.

『곤언』은 정통 유학자로서 주체적 사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글로,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묵수하지 않고 비판하면서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성리학적 저술로는 20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17조목으로 분석 비판한 「독심즉리설(讀心卽理說)」,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인정하면서도 ‘심’은 곧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심문(心問)」, 그리고 전우(田愚)의 견해를 비판한 「성존심비변」‧「성존심비적거변(性尊心卑的據辨)」 등이 있다.

그밖에 『암서집(巖西集)』『심재집(深齋集)』『조명록(措明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深齋集
儒學近百年(琴章泰‧高光稙, 博英社, 1984)

[집필자]

고경식(高敬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