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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李相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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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71(고종 8)
졸년1930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함경북도 경성
공훈건국포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상호(李相鎬)
1871년(고종 8)∼1930년.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경성 출신.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이주하여 전재일(全在一)윤태선(尹台善) 등 10여명과 함께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할 것을 단지(斷指)로써 결의하였으며, 그뒤 결사구국단(決死救國團)을 조직하여 고향을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향리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로부터 연통제(聯統制)국내조직의 책임을 맡아 함경북도 연통제의 총감(總監)으로 임명받고 귀국하여 함경북도내 10여개 군을 상대로 비밀리에 연통제 군조직을 완료하는 데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리하여 상해임시정부와 함경북도 경성군을 내왕하면서 군‧면단위조직을 완료하고 기밀문서의 수발, 군자금의 모금 전달, 밀정파악보고, 일제기관의 소재파악, 헌병‧경찰배치상황, 독립운동기관의 설치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20년 10월 향리에서 연통제조직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잡혔다.

1920년말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선도, 독립지사들을 격려, 고무하다가 요감시인으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에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였다. 출옥한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를 육성,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다가 옥고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朝鮮日報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韓民族光復鬪爭史(李炫熙, 正音文化社, 1989)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