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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한(鄭鎭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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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정순기(鄭純基)
자(字)사홍(士弘)
호(號)검와(檢窩)
생년1867(고종 4)
졸년1947
시대조선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경상북도 영일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정진한(鄭鎭漢)
1867년(고종 4)∼1947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영일(迎日). 일명 순기(純基). 자는 사홍(士弘), 호는 검와(檢窩). 경상북도 영일 출신.

영천의병장 환직(煥直)의 재종질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계기로 고종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은 아들 용기(鏞基)에게 거의할 것을 명하였다.

정진한은 이때 정용기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거의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廈)이창송(李蒼松) 등을 인근의 여러 지방으로 파견,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어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였고, 자신은 소모장(召募將)을 맡았다. 초기 산남의진의 활동 때에는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는 등의 임무를 띠고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청하읍으로 진격하던 중 경주진위대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계략에 빠져 대장 정용기 이하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때 정진한은 옥중의 정용기와 만나 옥중동정을 탐지하여 의진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그뒤 1907년 4월부터 산남의진은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정진한은 같은해 8월 영천 자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뒤 청하흥해군위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같은해 9월에 정용기가 순국하자 정환직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고, 청하영양영해일월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정환직마저 순국하자, 최세한(崔世翰)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의병항전을 계속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접전중 일본군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 때 특별사면되었다.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山南義陣遺史(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1970)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1986)
山南義陣考(裵勇一, 浦項實業專門大學論文集 6, 1982)

[집필자]

박민영(朴敏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