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희(申應熙)
[상세내용]
신응희(申應熙)
1858년(철종 9)∼1928년. 한말의 무신. 육군참위로 있으면서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서재필(徐載弼)‧정난교(鄭蘭敎) 등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게 되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 9인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5월 유혁로(柳赫魯)‧정난교와 함께 김옥균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지운영(池運永)을 유인, 그 밀계를 폭로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뒤 사면을 받아 귀국, 중추원부찬의를 거쳐 1908년 전라남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910년 국치 이후 함경남도장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서재필(徐載弼)‧정난교(鄭蘭敎) 등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게 되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 9인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5월 유혁로(柳赫魯)‧정난교와 함께 김옥균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지운영(池運永)을 유인, 그 밀계를 폭로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뒤 사면을 받아 귀국, 중추원부찬의를 거쳐 1908년 전라남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910년 국치 이후 함경남도장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甲申日錄(金玉均)
開化黨硏究(李光麟, 一潮閣, 1973)
朝鮮紳士名鑑(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金玉均傳 上(林毅陸, 慶應出版社, 1945)
甲申日錄(金玉均)
開化黨硏究(李光麟, 一潮閣, 1973)
朝鮮紳士名鑑(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金玉均傳 上(林毅陸, 慶應出版社, 1945)
[집필자]
박민영(朴敏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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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