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격(許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D5C8ACA9FFFFU9999X0 |
자(字) | 춘장(春長) |
호(號) | 창해(滄海) |
호(號) | 대명처사(大明處士)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양천(陽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허회(許淮) |
5대조 | 허굉(許硡) |

[상세내용]
허격(許格)
생졸년 미상.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춘장(春長), 호는 숭정처사(崇禎處士), 창해(滄海), 대명처사(大明處士).
좌찬성 허굉(許硡)의 5대손이다. 부(父)는 시(詩)로써 명성이 높았던 어은(漁隱) 허회(許淮)이다. 허격(許格)은 여섯 아들 중 다섯째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 의롭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였으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임금과 신하들은 차마 숭정황제(崇禎皇帝)의 무릎 아래 꿇어앉고, 부로(父老)들은 다투어 만력황제(萬曆皇帝)의 은혜를 머금었다[君臣忍屬崇禎膝 父老爭含萬曆恩].” 그러고는 단양(丹陽)의 둔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신의 호를 ‘창해(滄海)’라고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0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춘추(春秋)』를 읽었으며, 청(淸)나라의 달력은 보지 않았고 시를 지어 스스로 즐겨하였다. 일찍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 자에게 기증한 시에서 이르기를, “천하에 산이 있어 나는 이미 숨어 사는데, 온 지역(地域) 가운데 황제는 없거늘 그대는 누구에게 조회(朝會)하는가[天下有山吾巳遯 域中無帝予誰朝].”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어필(御筆)로 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네 글자를 구해서 얻어 가지고, 가평(加平)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다 본떠서 새겨놓고, 매년 3월 19일에 명나라 의종황제(毅宗皇帝)에게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나이 80여 세에 죽으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명정(銘旌)에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인 권만형(權萬亨) 등이 상소하여 청하므로, 영조가 명을 내려 그의 교지(敎旨)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게 하였다. 1735년(영조 11) 3월 27일 3품의 관직을 증직하였다.
좌찬성 허굉(許硡)의 5대손이다. 부(父)는 시(詩)로써 명성이 높았던 어은(漁隱) 허회(許淮)이다. 허격(許格)은 여섯 아들 중 다섯째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 의롭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였으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임금과 신하들은 차마 숭정황제(崇禎皇帝)의 무릎 아래 꿇어앉고, 부로(父老)들은 다투어 만력황제(萬曆皇帝)의 은혜를 머금었다[君臣忍屬崇禎膝 父老爭含萬曆恩].” 그러고는 단양(丹陽)의 둔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신의 호를 ‘창해(滄海)’라고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0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춘추(春秋)』를 읽었으며, 청(淸)나라의 달력은 보지 않았고 시를 지어 스스로 즐겨하였다. 일찍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 자에게 기증한 시에서 이르기를, “천하에 산이 있어 나는 이미 숨어 사는데, 온 지역(地域) 가운데 황제는 없거늘 그대는 누구에게 조회(朝會)하는가[天下有山吾巳遯 域中無帝予誰朝].”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어필(御筆)로 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네 글자를 구해서 얻어 가지고, 가평(加平)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다 본떠서 새겨놓고, 매년 3월 19일에 명나라 의종황제(毅宗皇帝)에게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나이 80여 세에 죽으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명정(銘旌)에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인 권만형(權萬亨) 등이 상소하여 청하므로, 영조가 명을 내려 그의 교지(敎旨)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게 하였다. 1735년(영조 11) 3월 27일 3품의 관직을 증직하였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海東人物誌
朝鮮人名辭書
海東人物誌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김상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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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