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李載先)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ACC120D1881X0 |
생년 | ?(미상) |
졸년 | 1881(고종 18)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족 |

부 | 이하응(李昰應)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재선(李載先)
미상∼1881년(고종 18).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다. 조선 26대 고종(高宗: 1852-1919.1.21)의 이복형이다. 1881년(고종 18), 전승지(承旨) 안기영(安驥泳: 1819∼1881), 권정호(權鼎鎬) 등이 민씨(閔氏) 세도와 개화정책(開化政策)을 반대하는 위정척사 상소운동이 고조되는 현상에 힘입어 이재선을 내세워 흥선대원군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하였던 광주장교(廣州將校) 이풍래(李豊來)의 배반으로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참형되었다. 이재선은 제주(濟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 거사의 실패로 흥선대원군의 재기와 위정척사 상소운동은 모두 저지되었다.
부친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다. 조선 26대 고종(高宗: 1852-1919.1.21)의 이복형이다. 1881년(고종 18), 전승지(承旨) 안기영(安驥泳: 1819∼1881), 권정호(權鼎鎬) 등이 민씨(閔氏) 세도와 개화정책(開化政策)을 반대하는 위정척사 상소운동이 고조되는 현상에 힘입어 이재선을 내세워 흥선대원군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하였던 광주장교(廣州將校) 이풍래(李豊來)의 배반으로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참형되었다. 이재선은 제주(濟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 거사의 실패로 흥선대원군의 재기와 위정척사 상소운동은 모두 저지되었다.
[참고문헌]
韓國人名大辭典
[집필자]
여선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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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