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남(洪喜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D76CB0A8B1595X0 |
자(字) | 자열(子悅)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남양(南陽[唐]) |
활동분야 | 외교 > 역관 |
[상세내용]
홍희남(洪喜男)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자열(子悅).
임진왜란 이후 대일 관계에 있어서 난관에 봉착하면 반드시 일본에 파견되었다. 1년 동안에 3계급이나 특진하여 나이 50도 못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1644년(인조 22)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본에 여섯번, 대마도(對馬島)에 여러 차례 다녀왔고, 명나라에도 두번 사신으로 다녀왔다.
1649년 인조의 국상(國喪)때 일본의 조제사(弔祭使)가 서울로 와서 진향(進香)하려고 하자, 이 문제로 부산에 내려가서 그 절차를 정하였으며, 그것이 그뒤 일본사신의 전례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일본에서 본 유황(硫黃)의 위용을 말하여 왕에게 그 필요성을 진언하게 하고, 1659년 문위사(問慰使)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유황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전파시켰다.
1659년(현종 즉위)에도 대마도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이후 대일 관계에 있어서 난관에 봉착하면 반드시 일본에 파견되었다. 1년 동안에 3계급이나 특진하여 나이 50도 못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1644년(인조 22)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본에 여섯번, 대마도(對馬島)에 여러 차례 다녀왔고, 명나라에도 두번 사신으로 다녀왔다.
1649년 인조의 국상(國喪)때 일본의 조제사(弔祭使)가 서울로 와서 진향(進香)하려고 하자, 이 문제로 부산에 내려가서 그 절차를 정하였으며, 그것이 그뒤 일본사신의 전례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일본에서 본 유황(硫黃)의 위용을 말하여 왕에게 그 필요성을 진언하게 하고, 1659년 문위사(問慰使)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유황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전파시켰다.
1659년(현종 즉위)에도 대마도에 다녀왔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通文館志
孝宗實錄
通文館志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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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