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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천민(孫天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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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송암(松庵)
생년?(미상)
졸년1900(광무 4)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종교 > 동학인
출신지충청도 청주

[상세내용]

손천민(孫天民)
미상∼1900년. 동학(東學)의 지도자. 도호(道號)는 송암(松庵). 충청도 청주 출신. 손병희(孫秉熙)는 서질(庶姪)이다.

동학에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없다고 하여 손병희를 입도시켰고, 문필이 뛰어나 동학의 각종 문서를 담당하였다.

1883년(고종 20) 손병희 등과 최시형(崔時亨)을 찾은 뒤 최시형과 같이 수도와 문답을 하며 동학을 포교하였다.

1892년 삼례역(參禮驛)집회에 가던 최시형이 낙상하자, 그곳에 가서 의송문(議送文)을 보내어 교도탄압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미온적인 반응만을 얻었다.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여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요구할 때 상소문을 지었고, 서병학(徐丙鶴)의 무력사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보은 장내(帳內) 집회에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로 참가하였다.

1894년 9월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청안(淸安)근방의 각 포(包)를 기포시켜 청주 북면에 1만여명이 회합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교전하였으나 대패하고 장내로 물러났다.

이후 영동‧용산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동학군을 해산하고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 쪽으로 피신하였다. 체포의 위험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포교활동을 재개하였다.

1896년 최시형은 손병희‧김연국(金演局)과 그에게 도호를 내려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교를 이끌어가도록 하였다. 최시형이 순도(殉道)하자 그와 김연국의 순사 주장과 손병희의 복수 주장의 갈등으로 분열의 기점이 되었다.

그뒤 그의 파들은 세력이 미약하여 부득이 손병희파에 합해 있었다고 한다.

1900년 손병희가 입도식(入道式)을 행할 때 박인호(朴寅浩)가 상위자가 되고 그는 성도주(誠道主)가 되었다. 최시형이 순도한 뒤 정부의 지목을 피하지 않아서 그해에 체포되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아들 재근(在根)은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를 세웠다.

[참고문헌]

東學史(吳知泳, 永昌書館, 1940)
東學亂記錄 上(國史編纂委員會, 1974)
天道敎百年略史 上(天道敎史編纂委員會, 1981)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