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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선(金伯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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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백선(金百先)
생년?(미상)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경기도 양평
공훈건국훈장 애국장

[상세내용]

김백선(金伯先)
미상∼1896년. 조선 말기의 의병. 경기도 양평 출신. 이명은 김백선(金百先).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학문은 많지 않았으나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지평(砥平)에서 일어나자 향인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포수대를 조직, 이를 토벌하였으며, 맹영재는 그 군공으로 지평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항일의 기운이 고조되자,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거의(擧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때 마침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거의하자, 1896년 1월 휘하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제천의병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어 같은 달 28일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의병의 지휘를 맡아 부대의 편제를 정할 때 선봉장에 임명되어 충주성 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3월 27일 가흥(可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센 항의를 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군기문란을 이유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제천의병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유생과 평민‧천민간의 상하 신분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9(國家報勳處, 1991)
1895∼1896 堤川義兵의 思想的 淵源과 展開(金祥起, 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1991)

[집필자]

윤병석(尹炳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