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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高永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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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관료 > 관리

[상세내용]

고영근(高永根)
생졸년 미상. 조선 말기의 관리‧독립협회회원.

1893년 8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98년 7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98년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참여하여 부회장을 지냈으나, 황국협회가 수구파(守舊派)의 폭력단체로 전락한 것을 깨닫고, 이를 탈퇴하여 당시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이고 있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협회의 총대위원(總代委員)으로 선출되었으며, 보부상의 내부사정을 잘 알았으므로,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파괴를 준비하는 황국협회의 보부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무렵 독립협회에서 선거한 중추원의관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개신유학적(改新儒學的)인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에서 발전한 국내사상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으며, 독립협회의 부회장 또는 회장대리급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898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육조(獻議六條)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권운동이 커다란 호응을 얻는 데 당황한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이 1898년 12월 만민공동회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을 내리고 시위대(侍衛隊)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기습적인 탄압을 가하자, 일본인 집에 피신하여 사태를 관망하다가 한때 잡히기도 하였다. 다음해 1월 만민공동회 대표로서 독립협회를 대표한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사후대책을 협의하고 그동안의 부채 가운데 일부를 부담하였다. 2월에는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지 여러 달이 지나도록 칙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추원의관에서 면직되었다.

같은해 5월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복설운동(復設運動)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3년 12월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별기군참령관을 역임하고 민비 살해에 가담하였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살해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大韓季年史
獨立協會沿歷略(獨立協會, 創作과 批評, 1970년 봄호)
獨立協會硏究(愼鏞廈, 一潮閣, 1976)

[집필자]

이윤상(李潤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