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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姜基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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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강기주(姜基周)
생년1884(고종 21)
졸년1911
시대항일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서울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강기동(姜基東)
1884년(고종 21)∼1911년. 의병장. 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강기주(姜基周). 서울 출신.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을 규합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뒤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위장귀순하여 장단 고랑포 일본헌병보조원으로 종사하였다. 이때 각지의 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기회를 노렸다. 당시 헌병대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10여명의 동지와 많은 포로의병들이 있었는데, 그는 숙직을 기하여 이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함께 무기 및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의병활동지역은 경기도 포천양주 등지와 강원도 금성회양통구 등지로 그 규모는 1백명 내외였다.

1908년 3월에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서울탈환작전에 실패하여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강원호(姜元浩)남학서(南鶴西)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더불어 결사토적할 것을 맹약한 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08년 겨울에는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 연기우(延基羽) 의진과 합세하여 200여명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 송우(松隅)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수일 후 그곳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던 중 왼쪽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연기우 의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그뒤 일본헌병사령부에서 체포하기 위하여 현상금 500원을 걸고 체포에 열을 올렸다.

1911년 2월 12일 원산에 나타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오처루(吾妻樓)에서 술을 마시다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 경무총감부에 수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를 묵자하고 옥중항쟁을 하다가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