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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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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안응칠(安應七)
이명(異名)안토마스(安多黙)
생년1879(고종 16)
졸년1910(융희 4)
시대항일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교육 > 교육가
안태훈(安泰勳)
조씨(趙氏)
김아려(金亞麗)
출신지황해도 해주

[상세내용]

안중근(安重根)
1879년(고종 16)∼1910년.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1. 가계와 성장
조부는 진해현감 안인수,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중에도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자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류(史記類)를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하여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고종 31)에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하여 동학군의 진압에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黙)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아서 많은 일을 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稧: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뒤로 교회의 신자들과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2. 교육활동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
3. 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
이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한 뒤 약 3, 4개월 뒤에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하여 비밀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그러나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천여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천신만고로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 애국지사를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4. 비밀결사 단지회 조직
1909년 3월 2일에는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서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5. 이토 암살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하여 이토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하여 만주에 오게 됨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에 대한 중대모의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6. 법정에서의 태도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힌 다음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일반살인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선변호인 미즈노는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는데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된 행동의 인간상으로서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安應七歷史(安重根自筆本, 1910)
安重根公判記錄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숭모회, 1970)
安重根의 思想과 義兵運動(愼鏞廈,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乙酉文化社, 1985)

[집필자]

오세창(吳世昌)
대표명안중근(安重根)
중근(重根)
성명안중근(安重根)

명 : "중근(重根)"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韓史綮v3槍先至哈爾濱待之伊藤至俄羅斯大臣率軍隊迎之重根乃披軍隊而入擧槍射伊藤中胸腹斃之大呼大韓萬歲軍隊就縛之重根大笑曰我豈逃者哉遂被囚于俄羅斯裁判所月餘日本人移囚于旅順所在關東法院之獄伊藤之死也太上皇聞之喜動顔色
韓史綮v3歸時伊藤旣解統監任自以旣得韓可以進圖淸國十月陽托游覽來滿洲與英吉利俄羅斯二國大臣相約會談於哈爾濱之港重根聞而喜曰天其送此賊乎懷槍先至哈爾濱待之伊藤至俄羅斯大臣率軍隊迎之重根乃披軍隊而入擧槍射伊藤中胸腹斃之
韓史綮v3羅斯二國大臣相約會談於哈爾濱之港重根聞而喜曰天其送此賊乎懷槍先至哈爾濱待之伊藤至俄羅斯大臣率軍隊迎之重根乃披軍隊而入擧槍射伊藤中胸腹斃之大呼大韓萬歲軍隊就縛之重根大笑曰我豈逃者哉遂被囚于俄羅斯裁判所月餘日
韓史綮v3以土們江爲韓淸分界淸從之○冬十月李載崑辭職退以李容稙代爲學部大臣○義兵將安重根殺伊藤博文于淸國哈爾濱重根胸有七黑子故小名曰應七因以爲字生海州幼徙信川讀書之暇好馳馬弄槍能於馬上射落飛鳥父成均進士泰勳之擊東學
韓史綮v3生海州幼徙信川讀書之暇好馳馬弄槍能於馬上射落飛鳥父成均進士泰勳之擊東學賊也爲先鋒殺賊甚多及伊藤統監我重根欲藉中國力維持乃浮海之上海求奇士數月聞父喪還旣葬以爲平安道甑南浦便於交通中國移就之傾家財起學校於平壤
韓史綮v3鼓行而前響應必多公等其各盡力遂引兵渡豆滿江入慶興郡襲殺日本戉兵五十人進至會寧爲日本大兵所逆擊衆皆潰散重根遂逸而歸時伊藤旣解統監任自以旣得韓可以進圖淸國十月陽托游覽來滿洲與英吉利俄羅斯二國大臣相約會談於哈爾
韓史綮v3復往誘說百端重根終不聽眞鍋決意殺之開公判引重根訊之循律例先問姓名年籍然後次及伊藤事曰若何爲害我伊藤公重根曰貴國之擊俄羅斯也貴皇宣戰書于我謂將保護韓之獨立乃旣克俄羅斯之後伊藤不遵貴皇之意以兵脅我敗我獨立此乃
韓史綮v3可謬解者乎夫汝殺我固當惟我生一日則汝國有一日之憂而眞是非之表白於天下也必有日矣眞鍋遂宣其罪三月繯殺之重根時年三十二重根平生不甚涉學然操筆能疾書在獄中作東洋平和論數萬言亦或吟詩以自遣日本及各國人爭出金購其札
韓史綮v3俄羅斯之後伊藤不遵貴皇之意以兵脅我敗我獨立此乃大韓臣民萬世之讐也安得不殺自去年十二月至春正月訊之者六重根終始一辭眞鍋遂以謬解伊藤保韓之主義斷以死罪旣而又遣人謂曰子今將死矣若能言謬解伊藤主義者生重根張目叱之
韓史綮v3生惡死人之情也然吾若欲苟生豈至於此子母誘我二人色沮而退明日復往誘說百端重根終不聽眞鍋決意殺之開公判引重根訊之循律例先問姓名年籍然後次及伊藤事曰若何爲害我伊藤公重根曰貴國之擊俄羅斯也貴皇宣戰書于我謂將保護韓
韓史綮v3爲韓人感悅於日本之保護及安重根殺伊藤博文恐各國有嘖言乃令關東法院長眞鍋遣通韓語者境喜明園木次郞就獄說重根曰伊藤公之施於貴國皆以造國家生民之福也子何爲害之今若幡然開悟以過悞自首日本政府必將憐君之志奇君之才立
韓史綮v3間以節聞者不可勝數而求其出類拔萃者始之有成三問朴彭年河緯地兪應孚李塏柳誠源六人終之有安重根一人焉然而重根尤壯矣摧折天下巨雄身雖死而志則遂天下之人之宸動也宜哉
韓史綮v3之才立予寬釋子其思之重根笑曰好生惡死人之情也然吾若欲苟生豈至於此子母誘我二人色沮而退明日復往誘說百端重根終不聽眞鍋決意殺之開公判引重根訊之循律例先問姓名年籍然後次及伊藤事曰若何爲害我伊藤公重根曰貴國之擊俄
韓史綮v3殺我固當惟我生一日則汝國有一日之憂而眞是非之表白於天下也必有日矣眞鍋遂宣其罪三月繯殺之重根時年三十二重根平生不甚涉學然操筆能疾書在獄中作東洋平和論數萬言亦或吟詩以自遣日本及各國人爭出金購其札前後在獄二百日
韓史綮v3訊之者六重根終始一辭眞鍋遂以謬解伊藤保韓之主義斷以死罪旣而又遣人謂曰子今將死矣若能言謬解伊藤主義者生重根張目叱之曰若等所謂謬解者何伊藤所爲之背人道滅天理童孺之所知也是寧有可謬解者乎夫汝殺我固當惟我生一日則
韓史綮v3貴國皆以造國家生民之福也子何爲害之今若幡然開悟以過悞自首日本政府必將憐君之志奇君之才立予寬釋子其思之重根笑曰好生惡死人之情也然吾若欲苟生豈至於此子母誘我二人色沮而退明日復往誘說百端重根終不聽眞鍋決意殺之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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