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홍(曺有弘)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870C720D64DB1876X0 |
| 자(字) | 백원(伯遠) |
| 호(號) | 우재(愚齋) |
| 생년 | 1876(고종 13) |
| 졸년 | 1914 |
| 시대 | 항일기 |
| 본관 | 창녕(昌寧) |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 부 | 조경찬(曺慶瓚) |
| 조부 | 조창방(曺昌邦) |
| 외조부 | 김규묵(金奎黙) |
| 출신지 |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간적리(澗赤里) |

[상세내용]
조유홍(曺有弘)
1876년(고종 13)∼1914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백원(伯遠), 호는 우재(愚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간적리(澗赤里) 출신이다.
부친은 조경찬(曺慶瓚)이며, 조부는 조창방(曺昌邦)이다. 모친은 서흥(瑞興) 김규묵(金奎黙)의 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 족형(族兄) 성재(惺齋) 조유찬(曺有贊: 1860∼193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유찬으로부터 학문의 요체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륜(人倫)의 일용지간(日用之間)에 있음을 배웠다. 이후 소이재(素履齋) 조병의(曺柄義: 1842∼1911), 위당(韋堂) 조용섭(曺龍燮),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따라 명리(名理)와 예학(禮學) 등을 배우면서 교유하였다.
39세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다.광주(光州) 노진승(盧鎭丞)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조석해(曺錫海)를 두었고, 김영종(金永鍾)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와의 사이에 조석하(曺錫河), 조석강(曺錫江), 조석한(曺錫漢)을 두었다.
부친은 조경찬(曺慶瓚)이며, 조부는 조창방(曺昌邦)이다. 모친은 서흥(瑞興) 김규묵(金奎黙)의 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 족형(族兄) 성재(惺齋) 조유찬(曺有贊: 1860∼193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유찬으로부터 학문의 요체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륜(人倫)의 일용지간(日用之間)에 있음을 배웠다. 이후 소이재(素履齋) 조병의(曺柄義: 1842∼1911), 위당(韋堂) 조용섭(曺龍燮),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따라 명리(名理)와 예학(禮學) 등을 배우면서 교유하였다.
39세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다.광주(光州) 노진승(盧鎭丞)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조석해(曺錫海)를 두었고, 김영종(金永鍾)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와의 사이에 조석하(曺錫河), 조석강(曺錫江), 조석한(曺錫漢)을 두었다.
[참고문헌]
愚齋先生文集
[집필자]
김성수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