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식(閔京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ACBDC2DDB1871X0 |
생년 | 1871(고종 8)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영수(閔泳秀) |
생부 | 민영주(閔泳柱) |
출신지 | 서울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경식(閔京植)
1871년(고종 8)∼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신. 민영주(閔泳柱)의 아들로 민영수(閔泳秀)에게 입양되었다.
1891년(고종 28)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9년 한성부판윤 겸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漢城府裁判所首班判事)를 거쳐 농상공부협판으로 있던 중 생부 민영주가 의정부의정 윤용선(尹容善)의 탄핵을 받게 되자 이를 변호하다가 면직되었으나, 곧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반포와 더불어 특별히 사면되어 농상공부협판에 재임명되었다.
1900년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으로 있다가 내부협판이 되어 시강원첨사와 서북철도국감독을 겸임하였다.
1901년 법부대신임시서리 조병식(趙秉式)의 탄핵으로 15년 유배형을 받고 백령도로 귀양을 갔으나 곧 방면되었고, 이듬해 2월 특별히 징계를 면하게 되었다.
그뒤 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904년 농상공부협판과 내장원감독에 임명되었다.
1905년 평리원재판장과 경무사, 그리고 궁내부협판을 역임하였다.
1906년 궁내부협판으로서 궁내부대신사무의 서리와 시강원첨사 및 제도국의정관(制度局議定官)을 차례로 겸임하였다.
1907년 비서감경(祕書監卿)과 시강원첨사를 거쳐 궁내부특진관 겸 의효전제조(懿孝殿提調)에 임명되었다.
1891년(고종 28)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9년 한성부판윤 겸 한성부재판소수반판사(漢城府裁判所首班判事)를 거쳐 농상공부협판으로 있던 중 생부 민영주가 의정부의정 윤용선(尹容善)의 탄핵을 받게 되자 이를 변호하다가 면직되었으나, 곧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의 반포와 더불어 특별히 사면되어 농상공부협판에 재임명되었다.
1900년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으로 있다가 내부협판이 되어 시강원첨사와 서북철도국감독을 겸임하였다.
1901년 법부대신임시서리 조병식(趙秉式)의 탄핵으로 15년 유배형을 받고 백령도로 귀양을 갔으나 곧 방면되었고, 이듬해 2월 특별히 징계를 면하게 되었다.
그뒤 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904년 농상공부협판과 내장원감독에 임명되었다.
1905년 평리원재판장과 경무사, 그리고 궁내부협판을 역임하였다.
1906년 궁내부협판으로서 궁내부대신사무의 서리와 시강원첨사 및 제도국의정관(制度局議定官)을 차례로 겸임하였다.
1907년 비서감경(祕書監卿)과 시강원첨사를 거쳐 궁내부특진관 겸 의효전제조(懿孝殿提調)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純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민영(朴敏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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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