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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趙秉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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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훈(公訓)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832(순조 32)
졸년1907(융희 1)
시대조선후기
본관양주(楊州)
활동분야문신 > 문관
조유순(趙猷淳)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조병식(趙秉式)
1832년(순조 32)∼1907년(융희 1). 조선 후기의 문관.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훈(公訓). 서울 출신. 현감 조유순(趙猷淳)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0년 예문관검열에 임명되고, 이듬해 홍문관정자를 거쳐 1862년 전라우도암행어사가 되었다.

1864년(고종 1) 성균관대사성, 1866년 성천부사로서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를 겸하고,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872년 좌승지에 임명되고, 1874년 강화부유수, 1876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충청감사 재임시에 탐학하였던 행적이 드러나 전라남도 나주목 지도(智島)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왔다.

1883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을 함부로 형살(刑殺)시킨 죄로 다시 유배되었다.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주청하고, 귀국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예조판서에 승진하고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두번째 중국에 다녀왔다.

1887년 형조판서를 거쳐 외부독판(外部督辦)이 되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데니(Denny, O. N., 德泥)와 더불어 조선국대표로서 러시아베베르(Veber, K. I.)와 조아육로통상장정(朝俄陸路通商章程)을 체결하였다.

1889년 9월 흉년을 이유로 방곡령(防穀令)을 선포하여 그해 10월부터 1년간 양곡의 대일본수출을 금지, 일본의 반발을 삼으로써 결국 11만원의 배상금을 변상하게 된 데 대한 책임으로 3등 감봉처분을 받았다.

1890년 강원도관찰사로 전근되고 이어 이조공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경기감사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이때 동학교도들이 교조의 신원청원서를 보내왔으나 이를 묵살, 오히려 동학교문에 대한 탄압과 기찰을 강화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정부의 무마책에 의하여 1893년 1월 경질, 이어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재임시 장오(贓汚)의 행적이 드러나 면천군에 투비(投卑)되었다.

1896년 중추원1등의관에 임명되고 이어 법부대신비서원경(祕書院卿)외부대신을 거쳐 1898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이 되었으나, 이 무렵 황국총상회장(皇國總商會長)이 되어 황국협회(皇國協會)를 배후에서 조종, 독립협회(獨立協會)타도의 선봉에 나서 그 횡포가 심하자 도리어 독립협회의 처벌요구로 통진에 천배되었다.

곧 방면되어 의정부참정에 복직되고 이어 법부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민종묵(閔種黙)이기동(李基東) 등과 함께 당시 이른바 5흉으로 만민공동회의 규탄‧습격을 받고, 독립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령이 내리자 외국인 집에 피신하였다.

1899년 중추원의장, 이듬해 탁지부대신이 되고 주일특명전권공사(駐日特命全權公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의정부참정으로 법부대신서리를 겸하였으나 주일공사 때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입건되었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외부대신을 역임하고 1903년 서북철도국총재(西北鐵道局總裁), 이듬해 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참정대신(參政大臣)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고, 이어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梅泉野錄
通文館志
陰晴史
大韓季年史
續陰晴史

[집필자]

이완재(李完宰)
대표명조병식(趙秉式)
병식(秉式)
성명조병식(趙秉式)
시호문정(文靖)

명 : "병식(秉式)"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東宮日錄v31番之孔酷實非尋常變異也根因宜亟盤覈按法定罪而當自政府宮內府有奏稟矣上曰當此天災告警恐懼修省誠如所奏矣秉式曰失火根因令法部警衛院警務廳嚴覈得情之意退當奏本矣上曰依爲之根命曰見今臨御之所其狹隘苟且非一時可御之
韓史綮v3要建昌於路奪書啓改其貶秉式之文以呈建昌知之從間道入京呈書啓王甚怒始建昌之詰群吏也有一吏被杖尋病死於是秉式使吏子訴建昌濫刑殺人秋八月竄建昌于碧潼秉式亦例謫之尋釋○時閔泳翊爲上所甚愛頗用事于內閔奎鎬憤其分權遂
韓史綮v3○先是十三年秋大饑行賑政明年分遣御史察賑濟得失忠淸右道御史李建昌以忠淸監司趙秉式貪虐收其群吏盤詰其贓秉式走入京訴于閔奎鎬奎鎬言于王曰李建昌以世讐欲陷趙秉式王信其言密使武監二人要建昌於路奪書啓改其貶秉式之文
韓史綮v3從間道入京呈書啓王甚怒始建昌之詰群吏也有一吏被杖尋病死於是秉式使吏子訴建昌濫刑殺人秋八月竄建昌于碧潼秉式亦例謫之尋釋○時閔泳翊爲上所甚愛頗用事于內閔奎鎬憤其分權遂成火病日服石膏冬竟死死之前數日王從其請授右
韓史綮v3其贓秉式走入京訴于閔奎鎬奎鎬言于王曰李建昌以世讐欲陷趙秉式王信其言密使武監二人要建昌於路奪書啓改其貶秉式之文以呈建昌知之從間道入京呈書啓王甚怒始建昌之詰群吏也有一吏被杖尋病死於是秉式使吏子訴建昌濫刑殺人秋
韓史綮v3繩以邪學陰爲奪財之計夏四月時亨招集其徒揭旗標之曰保國安民仍爲文布四方以斥洋倭誅閔泳駿趙秉式等爲名乃罷秉式以魚允中爲宣諭使洪啓薰爲招討使以遣之啓薰至報恩發大砲以威之呪徒稍懼於是允中宣敎撫諭使各安業其徒乃散○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9-30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1823년에서 1832년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