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노응규(盧應奎)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178C751ADDCB1861X0
자(字)성오(聖五)
호(號)신암(愼菴)
생년1861(철종 12)
졸년1907(융희 1)
시대조선후기
본관광주(光州)
활동분야호국 > 의병
노이선(盧以善)
출신지경상남도 안의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노응규(盧應奎)
1861년(철종 12)∼1907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오(聖五) 뒤에 경오(景五)로 고침., 호는 신암(愼菴). 경상남도 안의 출신.

노이선(盧以善)의 아들이며,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30세를 전후하여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1월 안의에서 의거, 의병을 모집하고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하여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 등과 진주성을 공격하여 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진주부민들은 정한용(鄭漢鎔)을 진주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진을 구성, 노응규의 진에 합세하였다.

3월 28일 부산을 공격하고자 김해일대에 병력을 집중시켰으나, 4월 11일 일본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였다.

이때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노응규를 배반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또한 아버지와 형 노응교(盧應交)가 살해되었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897년 10월 상경하여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리고, 1902년 동궁시종(東宮侍從)의 직책을 맡았으나,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렸다.

1906년 6월 최익현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고자 하였으나, 순창일대에서 거의 수일 만에 최익현 등 12인이 자진 체포, 의진이 해산되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에 충청북도 황간(黃澗)으로 들어가 서은구(徐殷九)엄해윤(嚴海潤)노공일(盧公一) 등을 주력부대로 재편, 무장하여, 1906년 가을 매곡면일대를 사병훈련소로 삼아 인근의 이장춘(李長春)문태수(文泰守)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합동훈련도 하였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8㎞ 지점의 일본군 및 척후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그뒤 경부철도 파괴, 열차전복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한성진군계획이 누설, 체포되어 한성경무서 감옥에서 옥중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抗日義兵將列傳(金義煥, 正音社, 1975)

[집필자]

김흥수(金興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