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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李範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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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삼(聖三)
생년1852(철종 3)
졸년1910(융희 4)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경하(李景夏)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이범진(李範晉)
1852년(철종 3)∼1910년.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삼(聖三). 서울 출신.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민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민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키는 데 주역이 되었다가 실패하여 러시아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주역이 되어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경무사가 되었다. 이완용(李完用) 등의 박해를 받아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고,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요구를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가,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한 뒤에 다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밀사로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위종(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으며, 러시아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고,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으며,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계동학교(啓東學校)‧세동학교(世東學校)‧신동학교(新東學校)를 통합하여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할 때에 1천루블의 거액을 지원하였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續陰晴史
大韓季年史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