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李載允)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ACC724B1849X0 |
자(字) | 성집(聖執) |
호(號) | 미석(渼石) |
생년 | 1849(헌종 15) |
졸년 | 191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출신지 | 경기도 양주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재윤(李載允)
1849년(헌종 15)∼1911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집(聖執), 호는 미석(渼石). 경기도 양주 출신. 고종의 종척(宗戚)이다.
1877년(고종 14) 충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승지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소박한 선비로 자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매국역적들을 참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거의하였다가 일본군에 패하여 지도(智島)로 귀양갔다가 온 뒤, 다시 임병찬(林炳贊)의 집에서 거사계획을 꾸미면서 후원하여주기를 부탁하자 곧 가재를 기울여 무기를 구입, 의병장이 되니 이에 따른 의병이 300여명이었다. 양주군 설악산으로 집결할 때 일본군이 급습하므로 한강상류 연안 민호리에서 대치하다가 미금면 금곡리에서 교전하고, 다시 광주군 서부면 송파장에서 결전을 전개하였으나 군량과 무기 부족으로 패하였다.
1907년 3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북경(北京)을 방문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로 하여금 구원병을 보내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주기를 요청하였지만, 위안스카이의 “중국도 망해가는 판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실망하여 이듬해 10월에 돌아왔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고향인 양근(楊根)으로 돌아왔는데, 연일 일제 헌병의 혹심한 압박과 조사에 격분하다가 이제껏 이룬 의거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항일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7월 13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가족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나 다음날 새벽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7년(고종 14) 충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승지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소박한 선비로 자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매국역적들을 참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거의하였다가 일본군에 패하여 지도(智島)로 귀양갔다가 온 뒤, 다시 임병찬(林炳贊)의 집에서 거사계획을 꾸미면서 후원하여주기를 부탁하자 곧 가재를 기울여 무기를 구입, 의병장이 되니 이에 따른 의병이 300여명이었다. 양주군 설악산으로 집결할 때 일본군이 급습하므로 한강상류 연안 민호리에서 대치하다가 미금면 금곡리에서 교전하고, 다시 광주군 서부면 송파장에서 결전을 전개하였으나 군량과 무기 부족으로 패하였다.
1907년 3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북경(北京)을 방문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로 하여금 구원병을 보내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주기를 요청하였지만, 위안스카이의 “중국도 망해가는 판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실망하여 이듬해 10월에 돌아왔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고향인 양근(楊根)으로 돌아왔는데, 연일 일제 헌병의 혹심한 압박과 조사에 격분하다가 이제껏 이룬 의거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항일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7월 13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가족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나 다음날 새벽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정원옥(丁原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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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