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황극동(黃極東)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69ADF9B3D9B1847X0
자(字)여직(汝直)
호(號)만운(晩雲)
생년1847(헌종 13)
졸년1921
시대조선후기
본관평해(平海)
활동분야학생 > 유생
황경화(黃景華)
조부황종운(黃鍾韻)
증조부황복하(黃復河)
외조부이양수(李陽秀)
처부김백순(金百淳)
출생지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 고곡리(古谷里)
묘소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 백운동(白雲洞)
저서『만운유고(晩雲遺稿)』

[상세내용]

황극동(黃極東)
1847년(헌종 13) 5월 24일∼1921년 3월 26일. 조선 말기 유생. 자는 여직(汝直)이고, 호는 만운(晩雲)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 고곡리(古谷里)에서 태어났다.

임진원종공신(壬辰原從功臣) 정략장군(定略將軍) 만휴당(晩休堂) 황귀성(黃貴成)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황복하(黃復河)이며, 조부는 황종운(黃鍾韻)이고, 부친은 황경화(黃景華)이다. 외조부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양수(李陽秀)이고, 처부는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백순(金百淳)이다.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20세 약관의 나이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사당에 고하는 일을 하루도 빼먹는 일이 없었으며, 기일(忌日)에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세찬 바람이 불거나 번개가 치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바르게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부모를 모실 때는 뜻을 받들고, 제사를 받들 때는 반드시 풍성하게 하였으며, 가법(家法)은 엄격하게 지켰으며, 친척들에게는 반드시 온화하고 화목하게 대했다. 마을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어진 사람을 받들고,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며 살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황찬세(黃燦世), 황찬시(黃燦時), 황찬우(黃燦宇)이고, 딸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상춘(沈相春)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 백운동(白雲洞)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문집 『만운유고(晩雲遺稿)』는 1책 석판본으로 권오봉(權五鳳)의 서문(序文)과 황병주(黃昞朱)의 발문(跋文)을 붙여 1959년에 편찬 간행되었다.

그는 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 당시 공훈을 세웠던 그의 선조(先祖) 만휴당(晩休堂) 황귀성(黃貴成)의 시문집인 『만휴당문집(晩休堂文集)』의 발문을 썼다.

[참고문헌]

만운유고(晩雲遺稿)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원문(http://www.nl.go.kr/nl/dataSearch/data_wm.jsp)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