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운(成岐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31AE30C6B4B1847X0 |
생년 | 1847(헌종 13)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성의익(成義益) |
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 |
[상세내용]
성기운(成岐運)
1847년(헌종 13)∼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정객. 본관은 창녕(昌寧). 충청남도 공주 출신.
노론파의 자손으로 성의익(成義益)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3월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이 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면서 약 1년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뒤 귀국하였다.
1885년 4월 홍문관수찬, 1889년에는 형조참의‧좌부승지‧한성부소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0년 9월 인천부사 겸 감리(仁川府使兼監理)가 되어 각국과의 교섭 및 통상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1900년 11월 주차일본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로 약 반년간 주재하면서 일본을 연구하였다.
1902년 12월 철도원 총재로 경부선철도공사에 관여하였고, 1904년 이후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6년 11월 박제순(朴齊純)친일내각의 농상공부대신, 1907년 6월 중추원부의장, 190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노론파의 자손으로 성의익(成義益)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3월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이 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면서 약 1년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뒤 귀국하였다.
1885년 4월 홍문관수찬, 1889년에는 형조참의‧좌부승지‧한성부소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0년 9월 인천부사 겸 감리(仁川府使兼監理)가 되어 각국과의 교섭 및 통상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1900년 11월 주차일본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로 약 반년간 주재하면서 일본을 연구하였다.
1902년 12월 철도원 총재로 경부선철도공사에 관여하였고, 1904년 이후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6년 11월 박제순(朴齊純)친일내각의 농상공부대신, 1907년 6월 중추원부의장, 190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履歷書
駐韓日本公使館記錄收錄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韓末官人의 經歷一般(崔永禧, 史學硏究 21, 1969)
駐韓日本公使館記錄收錄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韓末官人의 經歷一般(崔永禧, 史學硏究 21, 1969)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대표명 | 성기운(成岐運) |
성명 | 성기운(成岐運) |
성명 : "성기운(成岐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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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