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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건(鄭在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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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주(啓周)
자(字)경중(景中)
호(號)소송(小松)
생년1843(헌종 9)
졸년1910(융희 4)
시대조선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호국 > 우국지사
정최환(鄭㝡煥)
조부정검(鄭儉)
증조부정취하(鄭就河)
외조부김덕감(金德鑑)
출신지옥과(玉果)

[상세내용]

정재건(鄭在健)
1843년(헌종 9)∼1910년(융희 4).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재건(鄭在鍵). 자는 계주(啓周)경중(景中), 호는 소송(小松). 옥과(玉果) 출신이다.

증조부 정취하(鄭就河), 조부는 정검(鄭檢), 부는 정최환(鄭㝡煥)이며, 외조부는 부령김씨(扶寧金氏) 김덕감(金德鑑)이다. 처부는 성주배씨(星州裵氏) 배규현(裵奎賢)풍천노씨(豊川盧氏) 노광태(盧光泰)이다.

1888년(고종 25)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1892년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지평(持平)을 지냈다.

1894년(고종 31)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옥과곡성(谷城)이 합군되어 향교(鄕校)가 폐쇄되자 군내 유생들을 모아 반대하는 상소를 했으나 실패했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후 황현(黃玹)의 자결소식을 듣고는, “선비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라 말하고서, 침실의 벽에 “망국의 신하인데,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은 의리상 옳지 않은 일이다. 맹세코 명치(明治)의 세상에 살아 있지 않겠다[亡國之臣 義不可以苟生 誓不在於明治之世]”라 써붙인 뒤 절의검(絶義劒)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고흥의 덕양서원(德陽書院), 진안의 영광사(永光祠)와 이산묘(駬山廟)에서 배향하고 있으며, 보성의 죽곡정사(竹谷精舍)에서 그의 유문을 수습하여 《소송유고(小松遺稿)》 1책을 간행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國朝文科榜目
韓國人名大辭典
소송유고(小松遺稿)
기려수필(騎驢隨筆)

[집필자]

이정진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