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훈(許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D5C8D6C8FFFFB1836X0 |
자(字) | 순가(舜歌) |
호(號) | 방산(舫山) |
생년 | 1836(헌종 2) |
졸년 | 1907(융희 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김해(金海)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허조(許祚) |
출생지 |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林隱, 지금의 구미시 임은동) |
[상세내용]
허훈(許薰)
1836년(헌종 2)∼1907년.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林隱, 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 부친은 증참찬 허조(許祚)이다.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持門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의병(義兵) 군수(軍帥)인 허위(許蔿)가 아우인데, 허위의 손자들은 모스크바에 허진(許眞), 타시켄트에 허선산(許善山) 등이 거주하고 있다. 허훈의 성리설에 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심설(心說)」과 「사칠관견(四七管見)」이며, 실학과 유관한 것은 「염설(鹽說)」‧「포설(砲說)」‧「차설(車說)」‧「패수설(浿水說)」‧「해조설(海潮說)」 등이 있다.
그는 「사칠관견」과 「심설」에서 이이(李珥)의 성리설이 이황(李滉)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하였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 계승하였다.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持門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의병(義兵) 군수(軍帥)인 허위(許蔿)가 아우인데, 허위의 손자들은 모스크바에 허진(許眞), 타시켄트에 허선산(許善山) 등이 거주하고 있다. 허훈의 성리설에 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심설(心說)」과 「사칠관견(四七管見)」이며, 실학과 유관한 것은 「염설(鹽說)」‧「포설(砲說)」‧「차설(車說)」‧「패수설(浿水說)」‧「해조설(海潮說)」 등이 있다.
그는 「사칠관견」과 「심설」에서 이이(李珥)의 성리설이 이황(李滉)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하였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 계승하였다.
[참고문헌]
舫山文集
[집필자]
유명종(劉明鍾)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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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