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훤(許暄)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D5C8D6E4FFFFB1817X0 |
자(字) | 내석(乃碩) |
호(號) | 성재(省齋) |
생년 | 1817(순조 17) |
졸년 | 1867(고종 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김해(金海)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허경오(許慶伍) |
조부 | 허동성(許東成) |
증조부 | 허건수(許健壽) |
고조부 | 허겸(許謙) |
5대조 | 이연(李演) |
처 | 전주이씨(全州李氏) |
처부 | 이민환(李敏煥) |
출생지 | 경상남도 고성(固城) 척곡리(尺谷里) |

[상세내용]
허훤(許暄)
1817년(순조 17)∼1867년(고종 4). 조선 후기 유학자‧효자. 자는 내석(乃碩), 호는 성재(省齋)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경상남도 고성(固城) 척곡리(尺谷里)에서 출생하였다.
고조부는 천헌(川軒) 허겸(許謙), 증조부는 허건수(許健壽), 조부는 효행으로 이름이 높은 우헌(愚軒) 허동성(許東成)이다. 부친은 삼락당(三樂堂) 허경오(許慶伍)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민환(李敏煥)의 딸로, 산중군(山中君) 이연(李演)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남달리 크고 건장하였으며 총기가 있었다. 글을 읽게 되어서는 혹 뜻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을 만큼 골몰하여 끝내 그 뜻을 깨우쳤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널리 알고 깨우치는 것이 정밀하여 스승에게 ‘외우(畏友)’라는 칭찬을 들었다. 주자 성리학에 심취하여 예(禮)와 의(義)에 대한 깊은 탐구를 계속하였다. 1855년(철종 6)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크게 호곡하고 장례 후에도 매일같이 20여 리나 떨어져 있는 묘를 찾아 시묘하였는데, 비나 눈이 와도 그치는 법이 없었다. 1862년(철종 13) 부친 삼락공 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시묘살이를 하며 못 다한 효성을 다하였다. 묘가 외딴 곳에 있어 혹 지나는 이들이 공의 울음소리를 듣고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묘살이 중, 병을 얻어 1867년(고종 4) 세상을 떠났다.
고조부는 천헌(川軒) 허겸(許謙), 증조부는 허건수(許健壽), 조부는 효행으로 이름이 높은 우헌(愚軒) 허동성(許東成)이다. 부친은 삼락당(三樂堂) 허경오(許慶伍)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민환(李敏煥)의 딸로, 산중군(山中君) 이연(李演)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남달리 크고 건장하였으며 총기가 있었다. 글을 읽게 되어서는 혹 뜻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을 만큼 골몰하여 끝내 그 뜻을 깨우쳤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널리 알고 깨우치는 것이 정밀하여 스승에게 ‘외우(畏友)’라는 칭찬을 들었다. 주자 성리학에 심취하여 예(禮)와 의(義)에 대한 깊은 탐구를 계속하였다. 1855년(철종 6)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크게 호곡하고 장례 후에도 매일같이 20여 리나 떨어져 있는 묘를 찾아 시묘하였는데, 비나 눈이 와도 그치는 법이 없었다. 1862년(철종 13) 부친 삼락공 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시묘살이를 하며 못 다한 효성을 다하였다. 묘가 외딴 곳에 있어 혹 지나는 이들이 공의 울음소리를 듣고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묘살이 중, 병을 얻어 1867년(고종 4)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省齋先生文集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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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