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수(權永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D8CC601C218B1808X0 |
자(字) | 현보(賢甫) |
생년 | 1808(순조 8) |
졸년 | 1867(고종 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안동(安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권용전(權用銓) |
조부 | 권감(權堪) |
증조부 | 권상희(權尙熺) |
외조부 | 이화연(李華延) |
묘소 | 대전시 중구 어남동 |
묘소 | 대전 보문산 |

[상세내용]
권영수(權永秀)
1808년(순조 8)∼1867년(고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보(賢甫).
증조부는 태창수(太倉守) 권상희(權尙熺)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권감(權堪)이고, 부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진사(進士) 권용전(權用銓)이다. 외조부는 이화연(李華延)이고, 전처는 전주이씨 진사 이백영(李百榮)의 딸이고 후처는 진주강씨 강도흠(姜道欽)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37세의 나이로 뒤늦게 갑진증광문과(甲辰增廣文科)에 병과 18등으로 합격하였다. 1948년(헌종 14) 호남장시도사(湖南掌試都事)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 수대행실록승동부좌우승지(修大行實錄陞同副左右承旨)가 되었다. 1850년(철종 1)에는 접위사(接慰使)로 동래부(東萊府)에 파견되어 민정을 규찰하였다. 그 뒤 1852년(철종 3) 자산부사(慈山府使)로 부임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64년(고종 1) 57세 때, 특별히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승직되었고, 1866년(고종 3)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또 다시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자, 나아가 임기를 마치고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67년(고종 4) 6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책봉되었으나 그해 5월 4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예(文藝)에 재능을 보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시류를 쫓지 않고 대범하였다고 전한다. 묘는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 있다.
증조부는 태창수(太倉守) 권상희(權尙熺)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권감(權堪)이고, 부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진사(進士) 권용전(權用銓)이다. 외조부는 이화연(李華延)이고, 전처는 전주이씨 진사 이백영(李百榮)의 딸이고 후처는 진주강씨 강도흠(姜道欽)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37세의 나이로 뒤늦게 갑진증광문과(甲辰增廣文科)에 병과 18등으로 합격하였다. 1948년(헌종 14) 호남장시도사(湖南掌試都事)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 수대행실록승동부좌우승지(修大行實錄陞同副左右承旨)가 되었다. 1850년(철종 1)에는 접위사(接慰使)로 동래부(東萊府)에 파견되어 민정을 규찰하였다. 그 뒤 1852년(철종 3) 자산부사(慈山府使)로 부임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64년(고종 1) 57세 때, 특별히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승직되었고, 1866년(고종 3)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또 다시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자, 나아가 임기를 마치고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67년(고종 4) 6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책봉되었으나 그해 5월 4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예(文藝)에 재능을 보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시류를 쫓지 않고 대범하였다고 전한다. 묘는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 있다.
[참고문헌]
한밭人物誌
文科榜目
安東權氏 參議公派 家乘 卷3, 族譜
文科榜目
安東權氏 參議公派 家乘 卷3, 族譜
[집필자]
고윤수
대표명 | 권영수(權永秀) |
성명 | 권영수(權永秀) |
성명 : "권영수(權永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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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