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조(李源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D0C870B1792X0 |
초명(初名) | 이영조(李永祚) |
자(字) | 주현(周賢) |
호(號) | 응와(凝窩) |
시호(諡號) | 정헌(定憲) |
생년 | 1792(정조 16) |
졸년 | 1871(고종 8)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성산(星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규진(李奎鎭) |
생부 | 이형진(李亨鎭) |
[상세내용]
이원조(李源祚)
1792년(정조 16)∼1871년(고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이영조(李永祚),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星山)(주1)
.
이형진(李亨鎭)의 아들이며, 정언 이규진(李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본관 |
응와선생문집, 一庵先生文集跋, 養直先生文集序, 한주집(寒洲集)과 星山李氏世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성주(星州)에서 성산(星山)으로 수정함. |
이형진(李亨鎭)의 아들이며, 정언 이규진(李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哲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 | 이원조(李源祚) |
성명 | 이원조(李源祚) |
성명 : "이원조(李源祚)"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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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