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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돈인(權敦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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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희(景羲)
호(號)이재(彛齋)
호(號)우랑(又閬)
호(號)우염(又髥)
호(號)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호(號)번상촌장(樊上村庄)
시호(諡號)문헌(文獻)
생년1783(정조 7)
졸년1859(철종 10)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학 > 문인
권중집(權中緝)

[상세내용]

권돈인(權敦仁)
1783년(정조 7)∼1859년(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우랑(又閬)우염(又髥)번상촌장(樊上村庄) 또는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우의정을 지낸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권중집(權中緝)의 아들이다.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헌납을 거쳐, 1819년과 1835년(헌종 2)에 동지사(冬至使)서장관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청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1859년 연산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김정희(金正喜)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으며, 예서체(隷書體)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서화를 구득하면 김정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유작으로 「세한도(歲寒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김정희의 「세한도」와 화풍상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로 다루어져 싸늘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비하여, 그의 「세한도」는 윤필(潤筆)로 처리되어 보다 안온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간명한 구도라든가 넘치듯 배어 있는 농축된 문기(文氣) 등은 사의(寫意)를 지향하는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크게 진작시켰던 김정희의 화풍과 상통된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우리나라의 옛그림(李東洲, 博英社, 1975)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