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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준(姜學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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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익(聖翼)
호(號)한계(寒溪)
생년1770(영조 46)
졸년1821(순조 21)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관료 > 관인
강석림(姜錫臨)
조부강명후(姜命垕)
증조부강헌세(姜獻世)
외조부정광익(鄭光益)

[상세내용]

강학준(姜學濬)
1770년(영조 46)∼1821년(순조 2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익(聖翼), 호는 한계(寒溪).

증조부는 강헌세(姜獻世)이며, 조부는 강명후(姜命垕)이다. 부친은 강석림(姜錫臨)이며, 모친은 오천(烏川) 정광익(鄭光益)의 딸이다.

1792년(정조 16)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793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모친상을 지내고 나서, 1802년 조봉대부(朝奉大夫)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영릉령(英陵令), 그리고 다시 봉정대부(奉正大夫), 중훈대부가(中訓大夫) 되었다. 1803년 중직대부(中直大夫) 영릉령(英陵令)에 임명되었으며, 180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통훈대부 예조좌랑(禮曹佐郞), 조경묘령(肇慶廟令)이 되었다. 1806년에는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야사휘류(野史彙類)』 10책을 썼다. 1808년에는 병조좌랑, 1809년에 다시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오래 있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1811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권간(權奸)의 용사(用事)함을 지적하는 봉사(封事)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1812년 문천군수(文川郡守)에 임명되어 나갔으며, 이후 종화리(宗化里) 안계(安溪)에 정착하여 지구(知舊)들과 강론(講論)하고, 서숙(書塾)을 창건하여 향중(鄕中)의 교육에 힘썼다. 1816년 장령(掌令), 1817년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1821년에 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寒溪先生文集(姜學濬)

[집필자]

김성수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