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섭(李元燮)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D0C12DB1755X0 |
자(字) | 경일(景一) |
호(號) | 외헌(畏軒) |
호(號) | 화서(花西) |
생년 | 1755(영조 31) |
졸년 | 1816(순조 1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인천(仁川) |
활동분야 | 기타 > 처사 |
부 | 이약채(李若采) |
조부 | 이인항(李仁恒) |
증조부 | 이영태(李英泰) |
고조부 | 이협(李莢) |
처부 | 조담(曺䨵) |
외조부 | 박필정(朴弼廷) |
출신지 | 경상북도 대구(大邱) |
[상세내용]
이원섭(李元燮)
1755년(영조 31)∼1816년(순조 16). 조선 후기 처사(處士). 자는 경일(景一)이고, 호는 외헌(畏軒) 또는 화서(花西)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이다.
고조부는 이협(李莢), 증조부는 이영태(李英泰), 조부는 이인항(李仁恒), 부친은 이약채(李若采)이다. 외조부는 반남박씨(潘南朴氏) 통덕랑(通德郞) 박필정(朴弼廷)이며, 처부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담(曺䨵)이다.
1798년(정조 22)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24위로 합격하였다.
이원섭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안분상지(安分尙志)하였다. 부친 이약채(李若采)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원섭은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하며 명성에 영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도원암(陶菴院) 장임(掌任)이 이원섭을 재행(才行)으로 경상도절도사(慶尙道節度使)에게 추천하였고, 경상도절도사(慶尙道節度使)가 조정에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조부는 이협(李莢), 증조부는 이영태(李英泰), 조부는 이인항(李仁恒), 부친은 이약채(李若采)이다. 외조부는 반남박씨(潘南朴氏) 통덕랑(通德郞) 박필정(朴弼廷)이며, 처부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담(曺䨵)이다.
1798년(정조 22)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24위로 합격하였다.
이원섭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안분상지(安分尙志)하였다. 부친 이약채(李若采)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원섭은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하며 명성에 영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도원암(陶菴院) 장임(掌任)이 이원섭을 재행(才行)으로 경상도절도사(慶尙道節度使)에게 추천하였고, 경상도절도사(慶尙道節度使)가 조정에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참고문헌]
畏軒遺集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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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