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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술해(洪述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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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선(仲善)
생년1722(경종 2)
졸년1777(정조 1)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계손(洪啓孫)
생부홍계희(洪啓禧)
조부홍우전(洪禹傳)

[상세내용]

홍술해(洪述海)
1722년(경종 2)∼1777년(정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중선(仲善).

행대사간(行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의 손자로,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이며, 큰아버지 홍계손(洪啓孫)에게 입양되었다.

1759년(영조 3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되고, 이어서 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761년 사간이 되었다.

1763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다녀와 병사 이방좌(李邦佐)의 탐학상을 보고하고 엄벌할 것을 건의하여 양양(襄陽)에 10년간 유배하게 하였다. 이어서 부응교응교를 거쳐, 1764년 교리가 되고, 그뒤 승지를 거쳐 장연현안핵어사(長淵縣按覈御史)가 되어 민전(民田)을 강탈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간인을 살해한 현감 이경춘(李景春)의 죄상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뒤 집의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774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외지로부터 미곡(米穀)을 사들여오면서 1만 4000냥(兩)을 투식(偸食)한 사실이 해서찰민은어사(海西察民隱御史) 임희우(任希雨)에게 적발되어 파직되었다. 이어서 1776년(정조 즉위)에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장전(臟錢) 4만냥, 조(租) 2,500석, 송목(松木) 260주(株)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 찬(禶)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탄로나 아우 홍필해(洪弼海)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 및 조카 홍상간(洪相簡) 등과 함께 주살당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明義錄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홍술해(洪述海)
술해(述海)
성명홍술해(洪述海)
중선(仲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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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