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수(李惟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20C218B1721X0 |
이명(異名) | 이유목(李惟穆) |
자(字) | 심원(深遠) |
호(號) | 완이(莞爾) |
시호(諡號) | 정익(貞翼) |
생년 | 1721(경종 1) |
졸년 | 1771(영조 4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재(李在) |
5대조 | 이주(李珘) |
외조부 | 윤세위(尹世緯) |
[상세내용]
이유수(李惟秀)
1721년(경종 1)∼1771년(영조 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初名)은 유목(惟穆), 자는 심원(深遠), 호는 완이(莞爾).
선조의 9남인 경창군(慶昌君) 이주(李珘)의 5대손으로, 서윤 이재(李在)의 아들이며, 모친은 윤세위(尹世緯)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 유학으로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그해 정언이 되고, 곧 지평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1751년에는 정언으로 당역자(黨逆者) 9인을 탄핵하다가 영남에 유배되었다.
그뒤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복직되었으나 이전에 탄핵한 당역자들과는 같이 벼슬할 수 없다고 사퇴하자, 왕의 분노를 사서 삭탈관직된 뒤 도성문 밖으로 쫓겨났으나 왕이 뒤에 그 충의를 이해하고 다시 응교에 임명하였다.
1754년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2년 통정대부로 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1767년에 다시 예조참판에 올라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그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선조의 9남인 경창군(慶昌君) 이주(李珘)의 5대손으로, 서윤 이재(李在)의 아들이며, 모친은 윤세위(尹世緯)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 유학으로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그해 정언이 되고, 곧 지평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1751년에는 정언으로 당역자(黨逆者) 9인을 탄핵하다가 영남에 유배되었다.
그뒤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복직되었으나 이전에 탄핵한 당역자들과는 같이 벼슬할 수 없다고 사퇴하자, 왕의 분노를 사서 삭탈관직된 뒤 도성문 밖으로 쫓겨났으나 왕이 뒤에 그 충의를 이해하고 다시 응교에 임명하였다.
1754년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2년 통정대부로 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1767년에 다시 예조참판에 올라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그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雷淵集
國朝榜目
雷淵集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대표명 | 이유수(李惟秀) |
성명 | 이유수(李惟秀) |
성명 : "이유수(李惟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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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