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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섬(尹東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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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승(德升)
호(號)팔무당(八無堂)
생년1710(숙종 36)
졸년1795(정조 19)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현교(尹顯敎)
생부윤언교(尹彦敎)

[상세내용]

윤동섬(尹東暹)
1710년(숙종 36)∼1795년(정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승(德升), 호는 팔무당(八無堂).

윤언교(尹彦敎)의 아들이며, 뒤에 윤현교(尹顯敎)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4년(영조 30)에 전현감으로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전결(田結)을 잘못 보고하여 대론(臺論)으로 파직되었다.

1762년 충청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이산(離散)하므로, 호서안집사(湖西安集使)가 되어 흩어진 농민들을 안집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뒤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771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판서평안도관찰사우참찬을 거쳐 1790년(정조 14) 판의금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였다.

서예에 능하여 80세가 넘어서도 궁중의 서사(書寫)를 맡아 정조로부터 필력(筆力)이 유건(愈健)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달천사비(達川祠碑)」‧「적전사기적비(赤田社紀蹟碑)」‧「적지기적비(蹟池紀蹟碑)」‧「임경업충렬사비(林慶業忠烈祠碑)」 등 당시의 금석문은 그의 손으로 씌어진 것이 많았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