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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중(李存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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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이(敬以)
호(號)하당(荷堂)
생년1703(숙종 29)
졸년1761(영조 37)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현숭(李顯崇)
조부이유(李濡)
처부홍중복(洪重福)
외조부홍수헌(洪受瀗)
저서『척재집』
저서『국조명신록』

[상세내용]

이존중(李存中)
1703년(숙종 29)∼1761년(영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하당(荷堂).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예로, 영의정 이유(李濡)의 손자이고, 서윤 이현숭(李顯崇)의 아들이며, 홍중복(洪重福)의 사위이고, 홍수헌(洪受瀗)의 외손자이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 거쳐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출입하여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

1750년(영조 26) 합천군수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삼장장원(三場壯元)의 특전으로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여주목사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대사간에 취임해서는 왕에게 상소하여 권신인 김상로(金尙魯)형제를 신임사화 당시의 적당(賊黨)이라 탄핵하였기 때문에, 대신을 능욕하였다는 죄명을 받아 거제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그는 계속 말하기를,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라고 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투철한 애국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는 다시 정의현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에 풀려나와 초야에서 한적하게 묻혀 살 때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하게 살아갔다.

그는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히 지냈다.

그는 평소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사색당파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뒤늦게 김상로 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조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척재집』『국조명신록』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愓齋集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