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길보(李吉輔)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AE38BCF4B1699X0
자(字)계상(季祥)
생년1699(숙종 25)
졸년1771(영조 47)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정신(李正臣)
이씨(李氏)
조부이봉조(李鳳朝)
증조부이만상(李萬相)
조씨(趙氏)
처부조석명(趙錫命)
외조부유이진(柳以震)

[상세내용]

이길보(李吉輔)
1699년(숙종 25)∼1771년(영조 4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상(季祥).

이정귀(李廷龜)의 7세손이며, 증조부는 이만상(李萬相), 조부는 이봉조(李鳳朝)이며, 부친 이정신(李正臣)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5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 이현보(李玄輔), 이산보(李山輔), 이득보(李得輔), 이철보(李喆輔)가 있으며, 외조부는 유이진(柳以震), 처부는 조석명(趙錫命)이다. 부인 조씨(趙氏)와의 사이에 아들 이성원(李性源)을 두었다.

40세 때 1738년(영조 14)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로 합격한 후, 신천군수(信川郡守) 등을 지냈다. 1741년에는 액례(掖隷) 등이 기생들과 어울려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형리(刑吏)가 붙잡아가려 두들겨 맞은 일이 있었다. 이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임정(任珽)액례와 기생들을 붙잡아 가두자, 승지(承旨) 신사건(申思建)액례 편을 들며 그 형리를 가두고, 임금에게 임정의 허물을 묻기를 청하였다. 이 일로 임금이 형조낭관(刑曹郞官)이었던 이길보(李吉輔)의금부에 하옥시키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액례의 권력이 방자하여 액례의 권유를 회피할 길이 없었던 까닭에 이길보의 죄가 없다며 핵실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던 사건이 있었다.

55세 때 1754년(영조 30)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위로 급제한 후, 대사간(臺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1769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다. 1768년에는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1771년에 사망하였는데, 영조이길보의 형제(兄弟)가 해를 연이어 작고(作故)하자 제문(祭文)을 내려주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國朝文科榜目
朝鮮王朝實錄
雙溪遺稿
歸鹿集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