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조영석(趙榮祏)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70C601C11DB1686X0
자(字)종보(宗甫)
호(號)석계산인(石溪山人)
생년1686(숙종 12)
졸년1761(영조 37)
시대조선중기
본관함안(咸安)
활동분야문학 > 문인
조해(趙楷)

[상세내용]

조영석(趙榮祏)
1686년(숙종 12)∼1761년(영조 37).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또는 석계산인(石溪山人). 군수를 지낸 조해(趙楷)의 아들이며, 한성부우윤을 지낸 조영복(趙榮福)의 형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이다.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등용되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42년 선조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문집 『어계집(漁溪集)』을 개간하였으며, 1748년에는 숙종어진도사(肅宗御眞圖寫)의 감동(監董)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하였다.

노년에 저술한 문집 『관아재고』가 전하고 있다. 홍의영(洪儀泳)『관아재화첩』 발문에 의하면 “본래 인물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도 잘하였고, 금강산을 다녀온 뒤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냈으며, 또한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백악산(白岳山)아래에 살면서 정선(鄭歚), 시인인 이병연(李秉淵)과 이웃이 되어 교유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또한, 뒤에 영의정까지 지낸 유척기(兪拓基)와 그 형제들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와 영모(翎毛)에도 능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다소 경직되고 까칠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대체로 윤두서(尹斗緖)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화법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약간 가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그의 회화세계는 이인상(李麟祥) 등에게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등 조선 중기 문인화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일상적 풍물을 소묘한 작품들을 모은 「사제첩(麝臍帖)」(趙東濟소장)과 선비들이 소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장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장기도(將棊圖)」(간송미술관 소장)는 뒤에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하여 전개될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하는 작품들로서 주목된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서강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1733년에 그린 「방당인필어선도(倣唐人筆漁船圖)」 등이 있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觀我齋稿(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觀我齋稿와 麝臍帖의 價値(洪善杓, 전통문화 148, 1987)
觀我齋 趙榮祏畵道學考(姜寬植, 美術資料 44, 1989. 12.)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