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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몽린(韓夢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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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서(泰瑞)
호(號)봉암(鳳巖)
생년1684(숙종 10)
졸년1762(영조 38)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세혁(韓世赫)
저서『봉암집(鳳巖集)』

[상세내용]

한몽린(韓夢麟)
1684년(숙종 10)∼1762년(영조 3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태서(泰瑞), 호는 봉암(鳳巖).

한세혁(韓世赫)의 아들이다. 당숙(堂叔)인 한세양(韓世襄)의 문인이다. 1710년(숙종 36)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14위로 합격했으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경전(經傳) 연구에 주력하여 전례(典禮)‧상수학(象數學)에 밝았다. 『주자대전(朱子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연토(硏討)하여 그 가운데 학문의 절요처(切要處)를 뽑아 주야로 읽고 생각하였다. 함경감사 김한철(金漢喆)의 천거에 의해 1739년(영조 15)과 1743년에 중부참봉(中部參奉)영릉재랑(寧陵齋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관북부자(關北夫子)로 불렸으며, 이재형(李載亨)은 그를 당세(當世)의 진정한 유학자라고 찬미하였다. 그는 예학(禮學)에 밝아서 주희(朱熹)『가례(家禮)』이이(李珥)『격몽요결(擊蒙要訣)』을 기본으로 하고, 김장생(金長生)의 「문해(問解)」와 박세채(朴世采)의 예설(禮說) 및 「예변휘절(禮卞彙節)」 등을 참고로 하여 변례(變禮)를 절충자재(折衷自裁)했다. 그는 후진 양성에 힘을 썼는데, 학문과 도덕의 실질적인 이해와 실천을 갖도록 강조하였다. 최신(崔愼), 이재형(李載亨), 이원배(李元培), 유여호(劉汝豪), 임종칠(林宗七), 홍이우(洪理禹)주명상(朱明相) 등과 더불어 관북유학(關北儒學)을 이루었다. 저서에 『봉암집(鳳巖集)』이 있다. 1830년(순조 30)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참고문헌]

司馬榜目 正軒集 朝鮮王朝實錄

[집필자]

김삼현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