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신후삼(愼後三)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2E0D6C4C0BCB1683X0
자(字)이선(而先)
생년1683(숙종 9)
졸년1735(영조 11)
시대조선중기
본관거창(居昌)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원만(愼元萬)
생부신최(愼㝡)
조부신성기(愼聖夔)
증조부신해익(愼海翊)
처부나두동(羅斗冬)

[상세내용]

신후삼(愼後三)
1683년(숙종 9)∼1735년(영조 1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이선(而先)이고,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증조부는 신해익(愼海翊)이고, 조부는 신성기(愼聖夔)이다. 생부 신최(愼㝡)의 아들로 태어나 신원만(愼元萬)의 계자(係子)로 들어갔다. 처부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된 나두동(羅斗冬)이다.

1717년(숙종 43) 정유(丁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에 급제했으며, 가주서(假注書)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722(경종 2) 예조좌랑(禮曹佐郞), 1724(경종 14) 장령(掌令)에 올랐다. 영조 조에 들어서는 고산찰방(高山察訪), 영해부사(寧海府使)를 거쳐 1727(영조 3)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지조가 맑고 높았다. 명예와 절조를 중요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에도 권문세가의 집에 들락거리지 않았으며, 이에 벼슬이 높고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처사(處士)로 불리었다. 관직에 오른 이후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자기의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24년(경종 14)에는 그를 추종하는 석삼(錫三)이란 인물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당시 석삼은 무력을 자행하는 토호(土豪)로서 어사(御史)에게 죄를 입은 적이 있는데 신후삼흥덕(興德)에서 장령(掌令)이 된 후 그 힘을 믿고 전에 어사(御史)의 명을 받든 관원들이나 비위에 거슬렸던 이들을 붙잡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1728년(영조 4) 진주목사로 있을 때, 지방 토호(土豪)인 김수종(金守宗) 등의 무리와 함께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된 후 유배당하였다. 이후 1735년(영조 11)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

[참고문헌]

거창신씨세보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대표명신후삼(愼後三)
성명신후삼(愼後三)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