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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응허(羅應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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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장원(章元)
호(號)행정(杏亭)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충효열 > 의열
건계(建溪)
나안세(羅安世)
나안세(羅安世)
조부나보중(羅甫重)

[상세내용]

나응허(羅應虛)
생졸년 미상. 본관은 나주(羅州)=수성(壽城). 자는 장원(章元), 호는 행정(杏亭).

조부는 나보중(羅甫重)이고, 부친은 건계(建溪) 나안세(羅安世)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남평현감(南平縣監), 판관(判官)을 지냈다. 나주나씨(羅州羅氏) 집안의 여덟 효자 중 하나로서 김제(金堤)팔효사(八孝詞)에 제향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侍墓)살이 3年을 하였다. 그 동안 뜰의 연못에 연꽃이 피지 않고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지 않다가 상제(喪制)를 마치자 꽃이 피고 열매가 여니 그의 효성에 감동(感動)한 것이라 일컬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544년(중종 39)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송인수(宋麟壽)가 그의 효행을 계문(啓聞)하여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생원(生員) 나응허김제(金堤) 사람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평소에 효도와 우애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어버이를 섬김에는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아우 3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했으며, 아버지 상사를 만나자 아우 3명과 함께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상을 만나자 여묘살았다. 여묘살 적에 어린 아들이 병으로 장차 죽게 되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 매우 애처롭게 불렀었지만 그래도 가보지 않았고, 전후의 초상과 장사를 한결같이 예법대로 준행했었다. 그의 아버지 나안세(羅安世) 및 조부 보중(甫重)이 대대로 효도와 우애하는 가법(家法)을 전해 왔었는데, 나응허 때에 와서는 더욱 독실하므로 온 고을 안이 효우 세가(孝友世家)라고 했었다.’이다. 1555년(명종 10) 3월 21일 병진일 기사에는 남평현감으로서 백성을 잘 보살펴 향표리(鄕表裏) 1벌을 하사받았다는 사실도 실려 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姓號譜彙
朝鮮人名辭書
나주나씨중앙종친회(http://www.najunassi.net)

[집필자]

고윤희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