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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姜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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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회지(晦之)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금천(衿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비웅(姜非熊)
조부강양(姜揚)
5세손강석기(姜碩期)
처부성복동(成福仝)

[상세내용]

강희(姜曦)
생졸년 미상.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회지(晦之).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이고,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의 5대조이다. 조부는 강양(姜揚)이고, 부친은 강비웅(姜非熊)이다. 처부(妻父)는 성복동(成福仝)이고,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강숙돌(姜叔突)을 두었다.

본래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 이외의 생도와 사부학생(四部學生)은 관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1436년 학생이었던 강희 등이 임금에게 상언(上言)하여 한성시(漢城試)를 특설하게 하였다. 1439년(세종 21) 기미(己未) 친시(親試)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였다.

강릉판관(江陵判官)수 지평(守持平)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이조정랑이던 1449년에 그는 갑사취재(甲士取才) 때 함극명(咸克明)의 부탁을 받고 함극명의 창(槍)이 맞지 않았는데도 거짓으로 맞았다고 하여 사정(司正)으로 승진하게 해준 일이 탄로가 나 문화(文化)로 부처되었다.

문화강희의 집이 있는 신천(信川)과 가깝다고 하여 다시 풍천(豊川)으로 옮겨졌다. 그 후 여러 차례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에도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하삼도(下三道)로 옮겨 귀양보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朝鮮王朝實錄
愼獨齋全書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慵齋叢話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