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張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A5C2E0FFFFD1637X0 |
생년 | ?(미상) |
졸년 | 1637(인조 15) |
시대 | 조선중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처부 | 이흥립(李興立) |
공신호 | 정사공신(靖社功臣) |
[상세내용]
장신(張紳)
미상∼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1619년(광해군 11) 자기 소유의 집터를 왕실에 바쳐 벼슬을 얻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형 유(維)와 함께, 당시 궁궐을 수비하던 장인 이흥립(李興立)을 설득하여 내응하게 하는 한편, 직접 왕궁진입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유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그는 3등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삼전도(三田渡)를 요새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해 황해도감사가 되자 황주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근거를 두고 후금에 항전하다가 황해도로 옮겨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꺼려 그 이듬해 감사직을 사퇴하였다.
그뒤 수원부사, 다시 황해도감사‧평안도감사를 지냈고,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江都)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자기 소유의 집터를 왕실에 바쳐 벼슬을 얻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형 유(維)와 함께, 당시 궁궐을 수비하던 장인 이흥립(李興立)을 설득하여 내응하게 하는 한편, 직접 왕궁진입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유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그는 3등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삼전도(三田渡)를 요새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해 황해도감사가 되자 황주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근거를 두고 후금에 항전하다가 황해도로 옮겨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꺼려 그 이듬해 감사직을 사퇴하였다.
그뒤 수원부사, 다시 황해도감사‧평안도감사를 지냈고,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江都)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명 : "신(紳)"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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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