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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잠(李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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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인(原仁)
생년1561(명종 16)
졸년1593(선조 26)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이잠(李潛)
1561년(명종 16)∼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 공신. 자는 원인(原仁).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7대손이며,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이태빈(李台賓)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막료로 있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이잠의 현명함을 듣고 청하자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부하들이 잘 따르지 않았으나,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강화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 하니 사람들이 점차 이에 복종하였다.

이듬해 진주성의 위급함을 듣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싸우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다. 1600년(선조 33)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서훈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 적개의병장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최진옥(崔珍玉)
대표명이잠(李潛)
잠(潛)
성명이잠(李潛)

명 : "잠(潛)"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斷爛v12節曾於先朝疏陳我殿下在東宮時謀害諸凶自初至終極言竭論而至有左右前後莫不向忍於春宮等語矣及至白望劍出而言如合符契其先見之明固非凡人之所及而至於不顧死生挺身抗言之節雖古之陳東歐陽澈亦無以過之至今讀其疏莫不
斷爛v13齬乎大抵渠於獄中淹囚累月揣摩及其出時乃是籍重李潛洗濯一身以掩其從前斜逕而潛之死已久階梯路絶則謂矣身爲之一家之人而且與渠相識不過借其疑似之間驅作證援以實其言爲自解之計耳亦非以矣身爲有功也洎乎渠之偸馬事發
桐巢漫錄v2微杜漸有所處分其後有所陳達贈職此則過矣褒之者黨心也毁之者亦黨心也若此不已辛壬戊申後礙眼者豈不多耶若以 之侄而不用則國家寧有可用之人乎建極二字雖爲陳談此外無他道也
宣廟中興誌v3友信海南人進士任希進點皆募兵數百後皆死於晉州南原人參奉邊士頁聚兵二千餘人馳謁鄭澈澈許以軍官李潛爲其副出入危險勇健善戰後點死於晉州其餘大小鄕聚或午或百無慮數十百屯而皆無名績之可記者行朝又命置僧統募僧軍關
韓史綮v2不聞秋九月儒生李潛上書曰金春澤輩欲向刃於春宮而李頤命黨護之不誅春澤不竄頤命則國之存亡未可知矣王怒親鞫杖殺之○以金昌集爲右議政尋陞左議政以李頤命爲右議政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