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엽(李元燁)
[상세내용]
이원엽(李元燁)
미상∼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1617년(광해군 9)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 김대비(金大妃)의 폐출을 위하여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이 폐모계획을 강행할 때, 그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뒤 1622년 순천부사로 있을 때는 장수현감 이정신(李鼎臣) 등의 탄원에 의하여 구경록사건(仇景祿事件)에 연루되었다. 그 이유는 종을 시켜 무명 20필과 은 50냥을 주어 옥에 갇힌 구경록을 빼어냈다는 죄목이었는데, 이이첨의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원수진(元守眞)‧한희길(韓希吉) 등과 함께 정형(正刑)에 처하여졌으며, 그의 아들 영식(英植)도 폐모론에 적극 가담한 죄로 거제도에 정배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 김대비(金大妃)의 폐출을 위하여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이 폐모계획을 강행할 때, 그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뒤 1622년 순천부사로 있을 때는 장수현감 이정신(李鼎臣) 등의 탄원에 의하여 구경록사건(仇景祿事件)에 연루되었다. 그 이유는 종을 시켜 무명 20필과 은 50냥을 주어 옥에 갇힌 구경록을 빼어냈다는 죄목이었는데, 이이첨의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원수진(元守眞)‧한희길(韓希吉) 등과 함께 정형(正刑)에 처하여졌으며, 그의 아들 영식(英植)도 폐모론에 적극 가담한 죄로 거제도에 정배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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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